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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기순 ]
제목 한여대생의 불꽃 같은 삶-임낙평- mail 등록일 2010-09-16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1716
한 여대생의 불꽃 같은 삶

임낙평(광주전남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 들불 1기 강학)

1.
1978년 10월 박기순은 광천공단 내에 자리잡은 중소기업인 동신강건사에 신분을 속이고 일당노동자로 취업했다. 6․27 교육지표사건에 이어 6․29 전남대 시위사건에 연루되어 대학을 강제 휴학당하고, 그 후 7월 들불야학을 창설했으며, 저녁시간이면 들불야학에서 활동하고 낮시간에는 직접 노동자 생활을 체험하기 위하여 노동자로 취업한 것이다. 이른바, 80년대 공안당국의 언어로 보면 광주 ․전남지역 여대생 위장취업자 1호인 셈이다. 지난 80년대, 경향 각지의 수 많은 학생운동가 혹은 대학생들이 노동현장에 투신하여 그들과 함께 운동 일선에서 활동한 사례는 많이 있으나. 70년대에는 드문 일이었다. 열악하기 이를 데 없던 지방공단이었고, 이미 각오했지만 급료는 쥐꼬리만하고, 작업조건은 형편없으며, 사업주가 노동자들을 대하는 태도가 엉망으로 그 속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삶은 비참하기 이를데 없었다.

노동에 지친 하루였지만, 야학당에 들어서면 그녀는 해맑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이 즈음, 박기순은 ‘지식인들의 허위의식 극복’, ‘지식인들의 기득권 포기’ 등의 얘기를 자주 했다. “운동은 말이나 글이 아니라, 관념이 아니라, 현장성 있는 행동이 중요하다”는 주장도 했다. 박기순은 열악한 공장의 노동자 신분으로 현장에서 뼈저리게 이런 점을 느꼈다.
들불야학의 창설 의의도 마찬가지로 이러했다. 유신독재의 말기적탄압이 계속되고 있었고, 언론의 자유도, 결사와 집회의 자유도, 인간의 기본권도 보장되지 않았고 대학의 자율이나 학문의 자유도 독재체제가 거두어 가 버린 시절, 이를 돌파하고자 하는 학생운동이나 사회운동, 재야의 민주화 운동은 마치 계란으로 바위 치기로 보였던 시절에 박기순 등은 새로운 형태의 야학운동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78년 4월부터였다. 때마침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며 야학을 경험했고, 학생운동에도 관여했던 이들과 만나면서 구체적으로 야학 창설을 준비해 나가기 시작했다.

함평고구마 사건, 동일방직 사건 등에 관한 유인물이 학내에 뿌려지고, 시내의 그것에 관한 강연회 등이 열리면서 대학 사회에서 민중생존권에 대한 관심이 깊어갈 무렵, 그녀는 구체적으로 지식인과 노동자의 구체적 만남의 장인 야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당시 국사학과 2학년생이었던 신영일을 만나고, 인문대 1학년생이었던 임낙평(필자)을 만나고, 이경옥(당시 사범대 2학년, 현재 교사), 나상진(당시 공대 2학년, 현재 직장인) 등을 차례로 만났다. 만나서 사회과학서적을 읽고, 토론하는 세미나를 열었다. 선배 집 골방이나 자취방등을 순회하면서 말이다. 6월말쯤에는, 서울에서 내려온 전복길(당시 서울대 휴학, 현재교사), 최기혁(당시 한국외대 휴학, 현재 사업), 김영철(당시 서울대 휴학, 현재 회사원) 등이 야학 창설자금을 마련한다며 리어카장사를 하기도 했다.
6․29 전남대 시위 사건은 야학을 비하는 이들에게 돌발적인 일이었다. 전남대 도서관 농성이 시작되자, 박기순이 연단에서 발언하는가 하면, 신영일 또한 농성자의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노래를 지도하는 등 사건에 개입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신영일과 임낙평이 현장에서 연행당했으나 주동자가 아니라 석방되었다. 신영일은 농성을 지휘했다고 무기정학을 당했다. 박기순은 연행을 모면했으나 이미 ‘찍힌 인물’이라 공안당국의 연행 대상이었다. 이런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야학 창설 준비는 계속되었다. 광천공단과 가까운 광천동천주교회 교리실 한 칸을 야학당으로 빌리는 데도 박기순이 역할을 했다. 당시, 노동운동에 관심이 있었던 선배들을 박기순이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박기순과, 서울에서 내려온 최기혁이 나서서 장소를 확보한 것이다.
7월 어느날, 야학 창설 일정을 잡고 교구며 교재를 준비할 내용을 협의하면서, 야학당의 이름(당시 야학당이라고 했고, 학당이라고 불렀다.)을 짓는 회의가 있었다. 마라톤회의 끝에 박기순이 제안하였던 ‘들불’이 채택되었다. 소설가 유현종이 동학혁명을 소재로 쓴 소설이름이‘들불’이며, 혁명 당시 들불처럼 번져간 동학혁명의뜻을 기려 야학의 이름을 들불야학으로 정할 것을 제안한 것이다. 또한 박기순이 ‘미국의 노동운동 비사’라는 책을 읽고서 감명을 받았다며 그 책의 부제에 ‘들불’이란 용어가 들어 있다며 들불야학으로 채택할 것을 주장했다. 학당가는 통기타를 칠 줄 아는 고교시절부터 딴따라 기질이 있었던 신영일이 작사․작곡한 것이 채택되었다.
야학이 개교할 무렵, 박기순은 6․29 사건으로 연행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일시적으로 몸을 피한다. 당시 해남에 거주하고 있던 작가 황석영의 집에서 며칠, 서울의 친척집에서 며칠, 그렇게 연행을 피했다. 지속적인 도피는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지도교수와 협의하에 어쩔 수 없이 휴학계를 제출했고, 사찰 당국도 이를 수용했다.
이렇게 휴학을 하고 다시 정상적으로 야학에 나올 수 있었다.

2.
9월을 넘어서면서 야학은 바빠지기 시작했다. 3명의 서울 출신 경험이 있던 강학들이 군에 입대하기 때문이었다. 예정된 일이었지만 사람을 확보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한 겨울방학 무렵 2기생을 모집하려면 대기강학을 확보하고 그들을 훈련시켜야 했다.
그래서 만난 인물이 윤상원 이었다. “상원 오빠는 아직 찍힌 인물이 아니고, 순수한 열정이 있는 선배이며 직장을 때려치우고 내려온 인물이기 때문에 야학 참여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박기순은 윤상원의 야학 참여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윤상원은 심사숙고하고, 주변 선배 동료들과도 상의했다. 물론 박기순도 선배 동료들을 만나 윤상원동참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사실, 박기순은 윤상원과는 이미 잘 아는 사이였다. 윤상원의 자취방에서 ‘그룹스터디(그때는 그렇게 표현했음)’에 참여한 적도 있었고 가끔 만나는 사이였다. 12월에 접어들어 야학은 새 학기를 준비하고, 학생운동권의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차원에서 구상된 광천공단 노동자 실태조사팀 구성 문제 등으로 바빴다.
박기순은 낮시간은 공장에 나가 여느 노동자처럼 그렇게 노동을 하고, 저녁시간이면 사람을 만나거나 야학당에 나왔다. 그녀는 노동현장에서 본격적인 노동운동의 전개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고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분을 밝힐 수도, 혹은 이것저것 아는 것을 말할 수도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그래도 야학에 나오면 편했다. 단 몇 개월이지만, 노동자인 야학생들과 대학생인 강학들이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놀고 공부하는 모습이 좋았고, 듬직한 윤상원의 존재 또한 좋았다.
강학회의와 강학 MT가 이어졌다. 겨울방학이 시작되면 야학은 그때를 이용해 바쁜 일정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박기순은 자신의 향후 진로를 앞두고 고뇌할 수밖에 없었다. 계속 공장에 다녀야 할 것인지, 다니면서 당당하게 노동운동의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노동자로서의 삶을 산다는 것 또한 대학 휴학생이라서 관념처럼 느껴졌다. 또한, 겨울방학이 지나면 복학할 텐데, 복학해야만 하는 것인지도 명쾌한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박기순은 강학들과의 회의와 토론을 통해서 자신의 진로를 내심 정했다. 내년 1월 야학의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면 신영일(무기정학 중이었음)과 함께 복학하여 대학에서의 주된 활동 내용을 모색할 것을 마음먹었다. 야학에는 듬직한 상원 오빠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졸업강학으로서의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면 되는 일이었다. 6․27 전남대 민주교육지표사건 이후 침체된 대학 내의 학생운동을 새롭게 세우는 일도 중요한 일이었다. 들불 강학회의에서 겨울방학을 통해 광천공단노동자 실태조사팀을 구성하여 실태조사를 하고자 했던 뜻은, 관념적이고 구호로서의 운동이 아니라 민중현실과 노동현실을 정확히 인식하여 학내운동의 질을 향상시켜 나아가자는 취지에서 였다.
그렇게 한편으로는 공단노동자로서 하루를 보내고. 저녁시간이면 어김없이 야학당에 나타나 야학의 새 학기를 준비하고, 또한 사람들을 만나 실태조사팀의 구성을 위해 분주할 무렵 뜻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하였다.
1978년 12월 26일 새벽, 박기순은 오랜만에 귀가하여 그 동안 찌든 육신을 이불 속에 의탁하였고, 문틈과 방구들 사이로 스며드는 연탄가스를 밤새 마실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한 마디 말도 없이 영원한 잠 속으로 빠져들어 버렸다. 운명하기 직전, 23일 저녁은 ‘야학운동의 장기적인 전망’을 모색하고자 윤상원의 시민아파트 자취방(야학 공동방이나 마찬가지임)에서 지리한 토론으로 밤을 지새웠고, 다음날 저녁에도 성탄절 이브라 야학생들과 강학들이 노래를 부르고 정담을 나누며 밤새도록 보냈다. 그 비좁은 방에서 20~30명이 그렇게 어울렸다. 그리고 성탄절 날 야학당의 난로를 지필땔감을 구하러 리어카를 끌고 야학생들과 도시 변두리 야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었다.
그날 저녁 야학 수업이 끝난 밤 10시가 넘은 시각, 야학생들과 강학들에게 내일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 작은오빠인 박형선 집으로 오랜만에 귀가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 동안의 과로 때문에 잠에 골아 떨어졌고, 연탄가스가 스며들어오는 것을 의식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장례는 12월 28일 광주지역 재야 및 청년학생운동세력이 참여한 가운데 ‘학우장’으로 치러졌고, 망월동 시립묘역에 묻혔다. 이날 영결식 때, 작곡가이자 당시 농사꾼이었던 김민기가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로 시작되는 상록수를 조가로 불러, 사람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3.
박기순은 1957년 11월 7일, 전남 보성군 노동면 용호리 죽현마을에서 농부인 아버지 박도주 씨(작고하셨음)와 어머니 선덕애 여사의 3남4녀 가운데 막내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그곳 보성에서 초등학교(노동초등학교)와 보성여중 시절 우등생이었다. 고교 시험이 있던 시절, 그녀는 당당하게 전남지역 재원들만 모이는 전남여고에 자신있게 합격했다. 자식들을 향한 부모의 교육열이 대단해서 두 오빠와 두 언니를 대학까지 가르쳤다. 시골 앞뒤 동네를 합해, 빈농의 가정에서 이렇게 교육열이 있었던 가정은 거의 없었다. 전남여고를 졸업한 박기순은 1976년 3월, 미래 교사의 꿈을 지니며 전남대 사범대학에 무난히 합격했다.

박기순이 사회에 눈을 뜬 계기는 아마도 그녀의 오빠들 때문일 것이다. 그녀가 여고 시절이었을 때 작은오빠인 박형선이 당시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 그것 때문에 부모님의 걱정이 대단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사회정의와 진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대학 입학과 함께, 그녀는 작은오빠와 그의 선후배들을 통해서 사회의 비판적인 인식을 가질 수 있었다. 그녀가 작은 오빠 집에서 기거하였기 때문에, 오빠 집을 출입하는 세칭 운동권 오빠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이 밤새워 토론하는 때이면 자연스럽게 귀동냥으로 사회개혁과 사회정의, 민중운동에 대한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박기순은 자연스럽게 학내에서도 당시 성행하였던 독서회 활동에 가담하기도 했고, 당시 윤상원의 전남대 앞 자취방에서의 독서회 활동도 참여한 적이 있다. 유신체제 등장 이후, 학원의 자율성, 자유가 억압받고 있던 시절이라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또한 학내에 공식 동아리였던 독서와 봉사단체인 루사(RUSA)라는 서클에도 참여해 회원활동을 한 바 있으며, 1977년에는 사회봉사의 일환으로 산수동 변두리에서 꼬두메야학이란 야학활동에도 참여했다. 꼬두메야학은 들불야학처럼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방향성이 확실한 야학이 아니었다. 꼬두메야학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닫았지만, 1978년, 들불야학을 창설하겠다는 의지는 꼬두메의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 2학년을 넘기면서 그녀도 자신도 모르게 예비운동권의 학생이 되었다. 둘째오빠인 박형선이 제적생이고, 올케언니의 오빠인 윤한봉도 제적생이며, 또한 언니의 남편인 정환춘도 제적생으로(모두 민청학련 관련 구속경험이 있었음.) 구속자 가족이었기 때문에 선뜻 나서거나 앞장서기도 껄끄러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오빠들 틈 사이에서 학생운동이나 민중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길이 광주지역 새로운 야학의 개척이라 여기고 78년 야학 창설을 준비하게 된 것이다.

1982년 2월 20일, 5․18 광주민중항쟁을 짓밟고 등장한 전두환 정권의 철권통치가 계속되고 있었을 때 5․18묘역(구묘역)과 시립 묘역을 오가며 영혼결혼식이 개최되었다. 박기순 가족과 윤상원 가족, 친지 그리고 두 사람의 선후배 동지들이 모여 영혼결혼하는 두 사람을 눈물로서 축복해 주는 자리였다. 야학 시절 ‘영원한 노동자 누이인 박기순’과 5월 항쟁을 온 몸으로 지고 떠나 윤상원, 선후배들이 이들의 결혼을 주선했고, 부모들도 흔쾌히 여기에 동의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라는 님을 위한 행진곡은, 영혼결혼식을 전후해 작가 황석영 등이 노래극을 준비하면서 만들어진 노래였다. 노래극마저 공연할 수 없었던 어두운 시절, 이 노래를 담은 노래극은 황석영의 집에서 녹음되어 전국으로 배포되었고 그 가운데 ‘님을 위한 행진곡’은 80년대 투쟁의 현장에서 가장 애창되었던 노래였다.
지난 1997년 김영삼 문민정부 시절, 5․18묘역이 현재와 같이 성역화되고 5월 구묘역에서 신묘역으로 이장 의식을 거행할 때, 박기순은 윤상원과 함께 합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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