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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상원 ]
제목 어느 광대 같은 사람의 아름다운 삶-임낙평- mail 등록일 2010-09-16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2211
어느 광대 같은 사람의 아름다운 삶

임낙평(광주전남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 들불 1기 강학)


1.
1978년 7월, 윤상원은 대학 졸업 후 근무하던 서울의 주택은행 봉천동 지점에 5개월여 만에 미련 없이 사표를 제출했다. 취업을 준비했을 때부터 결심했던 바이지만, 막상 그렇게 실행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6월 27일 전남대학교 교육지표 사건의 여파로 시위에 연루되어 서울까지 도망온 조봉훈, 박몽구 등 후배들과의 만남이 있었던 얼마 후의 일이었다.
그가 사표를 내자 동료직원들은 윤상원이 더 좋은 직장으로 전직하는 것으로 알고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그는 사표를 제출하며 시골에 계신 부모님의 얼굴이 떠오르고, 장남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고뇌를 거듭했지만 결심 이후 그는 명랑하고 쾌활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직원들이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그는 홀연히 다시 광주로 내려왔고, 선배 김상윤의 녹두서점에 식객이 되었다. 김상윤은 윤상원이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한 후 친구 황철홍의 소개로 만난 선배였다. 윤상원은 김상윤을 만나 역사와 시대의 현실을 바로 볼 수 있었고, 민중들의 고난의 삶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사회과학 관련 서적을 읽기 시작했고 김상윤 주변의 세칭 민청학련 관련 사람들, 당시의 표현으로 의식화된 대학생들을 만났다. 민주인사들과도 만날 수 있었다. 헌책방인 녹두서점은 김상윤의 생계수단이자, 사회운동과 관련된 사람들의 연락처이자 모임터였다. 윤상원은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 김상윤과의 만남 이후 모든 면에서 김상윤을 닮았다고 할 만큼 둘은 가까워졌다.
다시 광주에 온 윤상원은 그 해 9월, 두 달 전에 창설된 들불야학에 참여해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지난 1970년 초, 서울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 사건 이후 그가 남겼던 일기 중 “대학생 친구가 있었다면…”이라는 내용이 알려지면서 서울 지역에서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야학이 등장하였고, 광주에서도 그와 유사한 노동자 대상 야학이 등장하였다. 야학을 운영하는 강학들이 7~8년 연하의 대학생들이고 윤상원은 졸업생이어서 다소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그는 주변 선후배들과 상의하여 참여를 결정했다. 황무지와 같은 지역노동운동의 씨를 뿌리고, 사회개혁의 밀알이 되겠다는 각오에서 결정을 내린 것이다.

더불어 그는 광천공단(당시 지방공단으로 현재 광천터미널 일대)의 한남 프라스틱이란 회사에 신분을 속이고 일당 노동자로 취업한다.
또한 11월 들불야학이 소재한 광천천주교회 지척에 위치한 광천시민아파트에 사글세로 입주했다. 공단에 근무하는 야학 학생과 함께 자취를 시작한 것이다. 이곳 시민아파트에서 당시 표현으로는 지역사회개발운동(요즘 같으면 주민운동 혹은 빈민운동)을 펼치고 있던 김영철, 박용준을 만나게 된 것이다. 김영철은 가족, 박용준은 함께 살며 주민운동을 펼쳐왔다. 광천시민아파트는 지금과 같은 아파트가 아니고, 수용소 같은 분위기의 시설이었다. 대학 졸업, 서울의 반듯한 직장에 취업, 미련없이 사표를 내고 하광, 그리고 일용 육체 노동자로의 위장취업과 들불야학 참여, 공단노동자 출신 야학생과 자취생활 시작 등 급반전을 거듭하는 삶을 윤상원은 스스로 선택하였다. 윤상원은 세칭 위장취업을 한 것이다. 후일 영혼결혼식의 신부 였고, 현재 5․18묘역에 그와 함께 안장된 박기순도 이 무렵 위장취업을 했으니 아마도 광주지역 위장취업 공동 1호일 것 이다.
편안한 미래가 보장된 삶과 입신출세의 길을 마다하고, 어쩌면 미련하고 바보 같은 삶의 방향을 윤상원은 설정하고 그렇게 실천한 것이다. 억압과 독재로 점철된 어둠의 시대에 엘리트 지식인 윤상원은 동트는 새벽을 향해 몸을 던진 것이다.

2.
윤상원이 가세한 들불야학은 활력을 얻기 시작했다. 야학의 강학들(당시, 가르치고 배운다는 뜻에서 야학교사를 ‘강학’이라고 했음)이 확충되고, 윤상원을 방문하는 선후배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윤상원이 야학생과 자취하는 3~4평짜리 거처는 야학 강학들과 야학생들의 자료실이자 회의실이며, 또한 휴식처였고 한끼 식사를 해결하는 곳이 되었다.
또한 강학 회의록, 야학 관련 자료등을 보관해 두는 곳이기도 했다.
윤상원은 광천동 들불야학에서, 유신독재의 말기와 10․26사건, 12․12사건을 맞았고 1980년 ‘민주화의 봄’ 그리고 5․18 항쟁과 항쟁의 마지막 시기를 살았다. 윤상원은 들불야학 참여와 동시에 들불야학의 핵심이 되었다. 강학들보다 7~8년 연상의 나이였고 지적 및 사회적 경험이 있었으며, 또한 야학운동을 포함한 다양한 사회운동의 정보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연하의 강학들, 그리고 노동자 야학생들을 암탉처럼 따뜻하게 품어주는 인간미가 있었다.
들불야학 참여 이후, 윤상원의 삶은 개인의 삶이 아니고 들불의 삶, 즉 들불공동체의 삶 그 자체 였다. 윤상원에게 시간과 공간은 들불을 위한 것이었고, 수입과 지출도 들불공동체를 위한 것이었다.
1978년 12월, 한남프라스틱을 그만두고 양동신용협동조합 직원으로 들어간 것도 들불공동체를 지켜나가기 위한 판단에서였다. 결혼 적령기의 윤상원에게는, 친구들이 다 하는 결혼도, 저축도, 고생만 해온 시골부모님의 보은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윤상원이 자리한 들불야학에는 유신독재의 말기적 탄압을 극복하고, 노동자 농민 등 민중이 대접받고 주인 되게 하는 사회개혁의 이론과 실천이 있었다. 노동자나 민중이란 말과 글마저 불온시되었던 독재정부가 조작한 사회적 분위기였으나, 야학의 운영과정에서 항상 보안을 말하면서 사회개혁과 혁명을 얘기했다. 정치사회의 흐름과 고도성장과 정치사회의 흐름과 고도성장과 재벌 위주의 경제현상을 분석하는 등의 세미나, 토론회가 항상 있었다. 노동운동과 학생운동 등 사회개혁 흐름을 평가하는 회의도 계속되었다. 들불야학은 단순히 야학이라는 공간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단순한 비정규 교육기관만은 아니었다. 왜곡된 역사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초보적인 훈련기관이었는지도 모른다.
윤상원은 이곳에서 뜻을 함께 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들불야학의 강학과 학생들, 주민운동을 펼쳐오던 김영철과 박용준을 만났다. 광천공단노동자실태조사반으로 참여한 지도급 학생활동가들(이들이 1979년 전남대 사회조사연구회 동아리를 창립)을 만났다. 대학 연극반의 후배였던 박효선과 문화운동 그룹들을 구체적 일로써 만났다. 또한 들불야학 바깥의 재야인사며, 감옥을 갔다 온 민주인사들과의 드러나지 않는 만남도 있었다.
1979년 3월부터 유신독재에 의해 들불야학에 직접적인 폐쇄압력과 탄압이 시작되고 대부분의 강학들이 정보사찰당국과 무기력한 대학당국으로부터 이중의 고통을 겪을 때, 들불야학은 좌초 위기를 맞았다. 이런 폐쇄 위기를 극복하게 된 것도 윤상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뇌와 실의에 빠진 대학생 신분의 까마득한 강학 후배들을 감싸고 격려하는 그의 열정이 아니었더라면 들불야학은 좌초했을지도 모른다.
10․26사건이 터진 이후, 들불야학은 유신독재의 종말에 쾌재를 부르며 한 차원 높은 야학으로, 그리고 합법적인 노동운동, 또한 정치 ․사회 민주화 운동에의 전환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들어와, 후일 전민노련 사건의 이태복(현재 보건복지부 장관)과 은밀히 만나, 본격적인 노동운동을 모색하였고, 80년 4월말 반합법조직인 전국민주노동자연맹의 조직결성에 참여하고 전남을 책임지는 중앙위원으로 선임된 것도 광천동 들불에서의 활동이 기초가 되었다. 또한, 세칭‘서울의 봄’ 시절 재야와 정치권, 그리고 청년운동체들에 의해 민주주의민족통일국민연합 전남지부의 실무자로 윤상원이 적합하다는 얘기도 진행되었다.
80년 2월, 윤상원은 들불야학의 졸업강학이 되었고, 노동자, 학생들과 함께 ‘들불회우증(일종의 졸업증서)’을 받았다. 물론, 졸업장과 함께 새로운 운동체를 모색하기 위한 만남도 지속되었다. 윤상원과 들불야학의 성원들이 뜨거운 삶을 살았던 야학당과 윤상원의 자취방은 퇴락한 채 오늘까지 남아 있다.

3.
윤상원은 5월을 위해 태어난 인물이었다. 그만큼, 5․18 민중항쟁의 전과정에서 윤상원의 존재와 역할은 컸다. 5월 18일 항쟁의 초기부터 5월 27일 새벽, 항쟁의 마지막 날까지 윤상원은 항쟁에 떨쳐나선 시민들 속에 자신의 온 몸을 던졌다. 국가권력을 송두리째 거머쥔 군부쿠데타 세력의 진압작전이 예고된 5월 26일, 윤상원의 결사항쟁론은 총부리 앞에 가슴팍을 내미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이는 정의와 진리, 민주주의와 민족의 통일을 위한 성전에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치지 않고는 안된다는 평소의 지론을 따른 것이었다. 27일, 계엄군의 작전이 시작될 무렵, 칠흑같이 어두운 전남 도청 앞뜰에서 총기를 나누어 주며 도청사수대에게 “끝까지 투쟁할 것”을 역설한 그의 마지막 연설도 ‘민주주의는 투쟁의 산물’이라는 이론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었다. 들불야학 시절 1978년 12월, 강학들과 손가락을 베어 맹세하면서 ‘죽기 위해서 살자’며 혈서를 쓴 적이 있었다.
항쟁 초기, 윤상원은 김상윤 선배의 녹두서점을 거점으로 항쟁에 참여한다. 5․17 조치로 운동의 주력을 이룬 대학생운동 지도부와 민주인사들이 예비검속으로 끌려가거나, 도피 ․은신한 상황에서 시민의 일원으로 항쟁에 가담한다. 5․17조치에 항거해 떨쳐 일어선 청년학생들, 점검 합세해 가는 시민들 속에서 윤상원은 과거에 경험하지 못했던 실제상황이 전개되는 것을 목도하고, 주저없이 항쟁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그는 항쟁 초기, 항쟁의 상황을 홍보․ 선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조직으로서 유일하게 가동할 수 있었던 들불야학 식구들과 함께 유인물 만들기 작업을 시작했다. 19일부터 시내 전역에 무차별로 뿌려진 투쟁을 선전하는 격문, 호소문 등이 윤상원이 작성한 것이었다. 박용준이 필경을 했고, 강학들, 야학생들이 배포원으로 나선 것이다. 그는 투쟁이 항쟁으로 승화되고, 전 시내와 시민들로 확산될 무렵 항쟁의 지속을 예고하며, 격문 수준의 유인물이 아닌 ‘투사회보’라는 이름으로 항쟁 소식들과 시민들의 참여를 선동하는 내용을 담아 조직적으로 배포해 나갔다. 투사회보는 21일부터 26일까지 9호까지 발간되었다.
계엄군이 시내에서 철수하고 해방광주가 시작된 5월 22일부터 윤상원은 항쟁의 조직화를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치안과 행정부재, 언론과 금융기능 마비 등 도시기능이 마비된 상태의 해방광주는 민주화의 열망, 군부쿠데타 세력이 퇴진하는 기운만이 존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역사상 유례 없이 도시 안정이 유지되었고, 질서도 유지되었으며 약탈이나 범죄행위는 평상시보다 없었다.
민주의 열기로 가득 찬 시민들의 항쟁을 지도할 지도부가 절대 필요했다. 윤상원은 녹두서점에서 광주 YWCA 회관으로 투쟁의 근거지를 옮겨 항쟁지도부의 결성에 나섰다. 도청에서도 각계인사가 참여한 시민 수습위원회, 대학생 수습위원회가 결성되어 활동을 펼쳤다. 수습위훤회는 명칭과 참여자들이 그렇듯이, 투쟁이나 항쟁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리고 도청에서 시민무장세력이 그들 사이에 혼재 되어 있었다.

윤상원과 YWCA에 모인 항쟁지도부들은 우선 시민항쟁을 조직화하기 위해 매일 도청 앞 광장에서 시민궐기대회를 열기도 하고, 민주인사와 대학생들을 규합해 나갔다. 박효선이 이끄는 극단 광대 성원들, 들불야학 그룹, 민주인사 옥바라지 때문에 결성되었던 송백회 등이 조직적으로 참여했다.
윤상원은 무장 시민군의 근거지이며, 한편으로는 수습위원회 기능이 유지되고 있던 도청을 드나들면서 무장 시민군들과 손을 잡는다. 25일 저녁, 시민 수습위원회와 대학생 수습위원회가 무기 수습과 반납, 외곽을 사수하는 시민군들의 무기 반납, 귀가 조치 들을 결의할 무렵, 윤상원은 무장 시민군 상황실장 박남선과 손을 잡고, 그같은 결의를 무산시키며 그날 저녁 광주시민학생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윤상원은 스스로 대변인을 맡는다. 항쟁 지도부가 결성된 것이다. 윤상원은 항쟁 대변인으로서 5월 26일, 계엄군의 무력진압이 예고된 긴박한 상황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내외신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는 그 자리에서 광주항쟁의 당위와 대정부 요구사항, 향후 투쟁계획을 설파했다. 당시 외신기자로 참여했던 미국의 ‘볼티모아 선’지 마틴블레들리 기자는 이날 기자 회견에서의 윤상원의 모습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는 몇 년 전, 광주를 방문해 윤상원의 생가를 방문해 가족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윤상원은 마지막 항쟁 마지막인 27일 새벽 4시가 넘어갈 무렵, 이양현과 김영철과 일단의 시민군들과 함께 도청 민원실 2층에서 도청을 사수하다 최정예 공수특공대원들의 공격을 받아 복부관통상을 입고 운명했다. 운명하기 직전 이양현, 김영철에게 “저승에서 만나서도 서로의 동지애를 나누며 살자”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4.
윤상원은 동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와중에 나라가 휩싸여 있던 무렵인 1950년 8월 19일(음력) 피울음을 토했다. 지금은 광주시로 편입되었으나 당시는 광주 인근이었던 전남 광산군 임곡면 신룡리 천동부락(현재는 광주시 광산구 임곡동)에서 농부인 아버지 윤석동씨와 어머니 김인숙 여사의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농촌에서 보내고, 교육열이 높으신 부모님 덕분에 중학교 시절부터 유학을 나왔다. 북중학교(현재의 북성중)와 사레지오 고교를 거쳤다. 출신학교가 그러하듯, 그는 공부를 잘하는 수재형 인물은 아니었다. 학교 성적도 반에서 중상 정도로,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는 고교를 졸업하고, 삼수생으로 전남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윤상원에 대한 부모님의 기대는 그 시대 부모님들이 다 그랬듯 컸었다. 더구나 장남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어머니는 윤상원이 광주에서 내려올 적마다 마을의 이 집 저 집에서 빌려 그의 학비며 용돈을 조달했다. 궁하기 이를 데 없는 농촌이라 어머니의 ‘고샅길 달음박질’은 그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까지 계속되었다.
윤상원은 초등학교 3학년 때 (1959년도)부터 일기를 썼다.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그는 작은 할머니(윤상원의 할머니는 두 분이었다.)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일기장도 작은 할머니가 사주고, 지도해 주었다. 중학 시절에 광주 자취방에서 작은 할머니의 뒷바라지로 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윤상원은 고교 시절까지 매년 한 권의 일기를 남겼고, 1977년과 1978년 들불야학 초기까지 간헐적으로 일기를 썼다. 일기 속에서는 소년, 청년 시절의 사상이 담겨있으며, 또한 소년, 청년의 눈으로 본 ‘60년대가 그대로 새겨져 있다. (일기 모음집은 ⌜미완의 일기⌟라는 책으로 출간되었음
이처럼 윤상원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냉정하게 성찰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의 일기에는 수많은 사람들, 친구ּㆍ선후배들이 등장하는데 그는 천성적으로 사람을 좋아했다. 그의 주변에는 항상 친구들이 있었고, 그렇게 맺어진 친구와 선후배들 사이는 ‘내 것, 네 것’이 없을 만큼 가까웠다. 고교, 대학, 연극반, 군 시절과 짧은 은행원 시절마다 친구들, 선후배들이 그의 주변에 있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가장 친한 친구는 윤상원이었다.

그는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고교와 대학 시절 그의 자취방은 항상 사람들이 들끓었고, 시골에서 조달하는 쌀 몇 말이 금방 동나버린 때도 많았다. 들불야학 시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또한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말을 재미있게 하고, 남의 말을 옮기더라고 재밌게 옮겼으며 술자리나 오락이 펼쳐질 때면 윤상원이 항상 중심에 자리하고 있었다. 김상윤을 만난 이후 사회운동의 영역에 자리하고서도, 들불야학에 참여할 때도 윤상원의 이런 재주는 변치 않았다. 그런 기질 때문에 대학 연극반 활동을 했고, 민속극 강좌에도 참여했을 것이다. 또한 이런 활동을 통해서 더 재비있는 사람으로 발돋움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운상원을 ‘영원한 광대’라고 이름지은 사람들도 있다.
따라서 윤상원과 그 주변에는 항상 재치가 있고, 웃음이 있었으며, 즐거움이 있었다. 들불 시절, 유신독재의 독한 탄압 속에서도 이런 윤상원의 친화력이 있었기에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낼 수 있었다.
윤상원은 이런 재능을 들불에 쏟았고, 5월 항쟁에 그가 지닌 모든 능력을 바쳤다. 그래서, 그가 떠난 지 22년이 흘렀어도 아직도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그를 그리워하는지 모른다. 살아있다면 만 52세, 중년의 나이이지만, 그는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결코 죽지 않는 만 30세 청년으로 영원히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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