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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용준 ]
제목 들불의 필경사 -전용호- mail 등록일 2010-09-16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2013

들불의 필경사
전용호(작가, 들불야학 2기 강학)

그는 부모님이 누구인지 모르는 고아다.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은 몇 장의 신상카드이다. 그의 생년월일은 1956년 7월 9일로 기록되어 있다. 고아원(영신영아원)에 입소한 날은 1956년 7월 15일, 본적은 고아원의 주소인 ‘광주시 동구 학운동 744번지 영신영아원(원장 서경자)이다. 영아원에서 그의 발육상태를 추정하여 생일을 7월 9일로 기록한 걸로 판단된다.
그는 1956년부터 9세가 되던 1964년까지 광주영신영아원, 1964년부터는 광주무등육아원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키가 1미터 50센티쯤 되는 단신에 실눈같이 가는 눈, 꾹 다문 입에 약간 합죽이 볼, 노래를 시키면 굵은 바리톤 창법으로 ‘떠나가는 배’를 잘 불렀다. 대부분의 고아들이 그렇듯이 그도 무등육아원에 다닐 때 여러 번 가출을 하여 시내에서 구두닦이도 하고 중화요리 식당 배달사원도 하다가 다시 돌아오곤 하였다.
18세가 되던 해인 1973년 11월 14일, 그는 광주 YWCA신용협동조합 교도원으로 취직을 하였다. 신협의 업무는 주변 상가를 돌면서 예금을 걷거나 장부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그에게 광주 YWC신용협동조합 일은 봉급은 적지만 보람도 있고 안정이 되었다. 그 동안 들쭉날쭉 수업을 채우지 못했던 숭의실업고등학교 야간부도 스무살이 되는 1975년에는 졸업을 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76년에는 방송통신대학에 입학을 하였다.

김영철과의 인연
박용준은 작은 체구에 말이 없어 여럿이 함께 앉아 있어도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조용했다. 박용준은 너무 조용하여 그와 인사를 나누고 악수를 해도 기억에 남지 않는다. 다만 김영철의 사촌동생쯤으로 생각할 뿐이다. 하지만 그와 김영철은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가가웠던 것 같다.
기록에 의하면 김영철과 박용준은 특별한 인연이 있다. 김영철은 1952년부터 어머니와 함께 광주모자원에서 적어도 5년 이상 살다가 학동 근처에 방을 얻어 자취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박용준은 1956년에 영신영아원에 입소하였다. 광주모자원과 영신영아원은 모두 다 서경자 원장이 경영하였다. 김영철은 서경자 원장을 이모라 불렀고 박용준은 어머니라 부른다. 그렇다면 김영철과 박용준은 이미 같은 곳에서 함께 자랐는지 모른다.
공식적인 기록을 보면 박용준과 김영철이 처음 만나게 된 것은 1976년 1월 7일부터 24일까지 2주간 진행된 제 51차 신용협동조합지도자 강습회에서였다. 김영철은 서경자 원장의 권유로 참여를 하였고, 박용준은 광주YWCA신협 교도원의 신분으로 참여하였다. 그리고 1년 후인 1977년 2월, 김영철이 광주YWCA신협의 참사로 근무를 하면서 정식으로 그와 인연이 맺어진 것으로 기록된다.
둘이 형제처럼 가까워진 것은 박용준이 김영철의 집인 광천동 시민아파트에 함께 살게 된 1977년 11월부터이다. 김영철은 박용준이 신협 사무실에서 숙식을 하는 것을 보고 함게 살기를 제안한다. 고아특유의 자존심이 강한 박용준은 절대 가지 않겠다고 뻗댄다. 하지만 김영철이 리어카를 빌려서 강제로 그의 짐을 싣고 광천동으로 데리고 가서 그때부터 박용준은 김영철과 함께 살게 되었다.

광천동 식구가 되다
박용준이 김영철과 함게 살기 시작하면서 그는 광천동 식구가 되었다. 김영철이 살던 10평도 되지 않는 시민아파트 한쪽 방에는 김영철과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다른 방에는 박용준과 그리고 들불야학 강학 중 박관현이거나 신영일이거나 임낙평이거나 그렇게 한두어명이 그날의 식객으로 씨어서 숙식을 하곤 했다. 그때는 밤 12시 통금이 있던 때라 더욱 그랬다. 광천동 식구가 된다고 하는 것은 김영철과 함게 지역개발운동과 삼화신협 재건운동에 참여하는 것, 그리고 들불야학 강학들과 함게 사귀는 것, 그래서 막걸리를 먹으면서 박관현의 ‘방랑 김삿갓’에 맞추어 젓가락 장단을 쳐주고, 윤상원의 구수한 판소리 ‘소리의 내력’을 듣고 박용준 자신도 일어나 벨칸토 창법으로 ‘떠나가는 배’를 불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박용준은 김영철이 하는 지역개발운동과 삼화신협재건운동, 그리고 들불야학에도 자연스럽게 참여하였다. 그는 마치 김영철의 조수처럼 그의 옆에서 소리 없이 그를 도왔다. 또한 박용준은 아파트의 유진청년회 활동과 들불야학 졸업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는 소모임의 학생이자
특별강학으로도 참여하였다.
박용준은 여러 방면에 재주가 많았지만 특히 인쇄용 종이에 글씨를 쓰는 필경에 조예가 깊었다. 당시는 인쇄를 하려면 별도의 인쇄용 종이에 철로 된 펜으로 활자를 그려서 등사를 하였다. 그리고 필경뿐만 아니라 등사하는 속도도 월등히 빨랐다. 그의 필경과 등사실력은 들불야학의 교재를 만들 때나 신협의 인쇄물, 심지어는 시위용 유인물 만들 때도 제대로 활용되었다. 일이 많아 밤을 새워서 해야 하는 경우에도 그는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묵묵히 일을 끝냈다.

5월항쟁에 참여
5월 19일, 박용준은 직장인 광주YWCA신협에 정상적으로 출근을 하였다. 당시 광주YWCA신협은 도청 앞인 금남로 1가에 있었다.
오전 10시쯤 40여 명의 공수대원들이 YWCA신협 사무실로 들어오더니 박용준을 대학생으로 의심하고 연행하려고 하였다. 박용준이 대학생이 아니라 신협의 직원이라는 것을 김영철과 다른 여직원들이 나서서 증언을 하였다. 공수들은 용준의 소지품 검사를 하고 나서 의심을 풀었다. 용준이 대학생이 아니란 것을 파악한 그들은 곧바로 2층으로 올라가 당시 양서조합 직원으로 있는 황일봉을 현관으로 끌어내려 몽둥이로 내리치려고 하였다. 그러자 황일봉의 영동생이자 양서조합의 직원이었던 수진 양이 동료직원이라고 밝혀 황일봉도 무사할 수가 있었다.
그때 YWCA 옆 건물에 무등고시학원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공무원 시험준비를 하는 청년들이 “야, 그러지 마라!” 고 소리를 치자 공수대원들이 고시학원으로 올라가 몽둥이를 휘둘러 학원생들을 1층으로 내려오게 하였다. 그리고 1층 입구의 셔터를 사람 한 명만 겨우 빠져나올수 있을 만큼 열어놓고 학원생들을 기어나게하고서 몽둥이로 머리, 어깨, 허리 등 온몸을 사정없이 두들겨팼다. 그리고 군화발로 짓밟고 몽둥이로 무차별 난타하여 학원생들이 쓰러지자 군용 트럭에 싣고 어디론가 떠나갔다.
박용준은 신협 창문 너머로 그 광경을 지켜보며 치를 떨어야 했다. 박용준은 그날 이후로도 시위에 참여하여 참혹한 현장과 특히 5월 21일 계엄군이 퇴각하면서 시민들을 향하여 무차별 발포를 하였던 것을 모두 목도하였다.

간간이 들리는 총소리를 밤의 정적을 깨고 있다.
악몽의 몇 일
노는 게 그립다. 긴긴 진리의 캠퍼스
즐겁던 학우들
소총 소리
불안, 차라리 불안이라고 말하기보다
걱정,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구나
오늘 오후 그들은 드디어 우리를 향해 사격을 가했다.
쓰러지는 몇몇 우리의 학우와 시민들.
품에 번지는 피!
모든 건 확실했다. 피!
파란 캠퍼스의 잔디 위에 내려 쪼이는 따스한 햇볕
우리의 피를 원한다면
이 조그마한 한 몸의 희생으로 자유(악몽의 몇일, 이런 게 지옥이란 걸 느낀다)라는 대가를 얻을 수 있다면 희생하겠다.
헬기소리, 또 총소리
싸우다 쓰러져간 우리 학우 그리고 광주시민
나도 부끄럽지 않게 일어서리라.

우 글은 계엄군이 광주에서 퇴각하기 전 도청 아ㅠ에서 시민들을 향하여 무차별 발포를 하였던 1980년 5월 21일, 그 광경을 목도하고 분노의 감정에 휩싸여 쓴 박용준의 시이다. 이 시는 일기장에 적혀 있었다.

투사회보 팀 합류

그의 멋진 글씨 쓰는 솜씨는 결국 그를 투사회보 제작 전문 필경사가 되게 하였다. 투사회보는 처음에는 김성섭, 동근식, 서대석 등 강학과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투사회보’라는 제호가 아닌 ‘광주시민일동’혹은 ‘대학생 일동’등의 불특정한 명칭을 사용하여 인쇄를 하였다. 그러던 것이 20일, 녹두서점에서 긴급하게 열린 대책회의에서 ‘들불야학’팀이 홍보를 맡는다는 회의 방침에 따라 정식 명칭을 ‘투사회보’로 정하고 전용호, 김경국, 동근식, 김성섭 등이 야학 교실로 쓰던 자취방에서 제작을 시작하였다.
박용준이 투사회보 팀에 합류를 하기 시작한 것은 22일부터였다.
21일 계엄군이 마지막으로 버티고 있던 도청에서 빠져나가자 광주시내 일원은 해방공간이 되었다. 광천동에서 수동 등사기에 의존해서 제작하던 투사회보를 시내 YWCA로 옮겨 더 많은 양을 제작하기로 결정하여 장비와 사람들 모두 시내 YWCA로 옮겼다. 박용준은 이때부터 합류하였다. 마침 YWCA에는 기계식 반자동등사기 2대가 있어서 필경만 하면 한 시간에 몇백 장씩 인쇄가 되었다.
5월 20일, 1호부터 ‘투사회보’라는 명칭으로 제작되다 25일 수습위원회에서 투쟁위원회로 조직이 변화되면서 ‘민주시민회보’로 제호를 바꾸어 13호까지 제작되었다. 투사회보의 반듯반듯한 글자체의 대부분은 박용준의 글씨이다.

장렬한 산화
5월 27일 새벽, YWCA에는 투사회보, 궐기대회, 가두방송, 대자보 등 주로 홍보활동을 하는 청년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투사회보팀은 들불야학, 김상집이 운전하였던 전남대학 스쿨버스의 가두방송팀, 박효선과 김태종의 궐기대회 진행팀, 대자보를 작성하던 여학생등 50여명에 달했다. 새벽 2시쯤 도청으로부터 비상이 떨어지자 여학생들과 얼굴이 알려진 궐기대회 팀은 건물 뒤쪽 가정집 담을 넘어 먼저 피신을 하였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은 총을 나눠 들고 비상 경계를 섰다. 몇 명은 상황파악을 위해 도청으로 출발하였다. 뒤쪽에는 동근식과 이규현, 1층에는 고등학생들, 2층에는 김성섭과 나명관, 박용준은 YWCA3층에 배치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시내 여기저기에서 총격소리가 들렸다. 계엄군의 총소리는 ‘드르륵, 드르륵’인데 반하여 시민군의 총소리를 ‘따콩,따콩’이었다. 계엄군의 총은 탄환이 여러 발이 나오는 M16자동소총이고 시민군 총은 단발인 M1이거나 카빈총이어서 소리조차 달랐다.
게다가 시민군의 총기는 예비군 무기고에서 오랜 기간 훈련용으로 처박혀 있던 것들이어서 발사 여부도 미지수였다.
하늘이 희뿌옇게 동이 터 오자, 시민군이 배치되었던 계림초등학교 등의 시내 외곽, 그리고 도청이 모두 함락되었다. 그리고 나서 계엄군은 YWCA를 공격해 왔다. 몇몇의 계엄군이 YWCA 앞 전일빌딩에서 총을 쏘아댔다. 계엄군의 주력부대는 아니었다. YWCA에서도 계엄군을 향하여 반격을 하였다. 전일빌딩 뒤에 우체통이 하나 있었다. 계엄군이 우체통 뒤에 숨어서 YWCA를 향해 총을 쏘았다.
박용준은 3층 바닥에 엎드려 계엄군을 향해 총을 쏘았다. 그때 다른 지역에 있던 계엄군들이 YWCA를 앞뒤에서 조여오기 시작하였다.
YWCA 3층이 훤하게 내려보이는 지점인 전일빌딩 5층쯤 되는 곳에 계엄군이 진입하였다. 그곳에서는 엎드려 있는 박용준이 훤하게 내려다 보였다. 계엄군은 박용준을 향해 M16 자동소종을 갈겼다.

그 이후
“이 한 몸의 희생으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 희생하겠습니다. 하느님, 도와 주소서. 모든 걸 용서하시고 세상에 관용과 사랑을!.....”
박용준이 26일 쓴 일기의한 대목이다.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견이나 한 듯이 유서처럼 느껴지는 글이다. 박용준은 그렇게 갔다.
박용준이 죽은 후 보상금 귀속 문제로 법원분쟁이 있었다. 그의 마지막 직장이자 영혼이 세상을 떠난 그 자리인 광주 YWCA와 핏덩이 상태에서 입소를 하여 어린 시절을 자랐던 영신영아원에서 보상금을 서로 수령하겠다고 주장을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박용준의 보상금은 결국 YWCA로 귀속이 되었다. 광주 YWCA는 박용준 명의의 장학사업을 하겠다는 명분을 니걸었고 법원도 그런 광주 YWCA의 손을 들어 주었다.
1980년 5월 31일, 그는 사체 없이 장례 예배를 드렸으며 지문조회 결과 망월동 무연고자 사체 중에서 찾아내어 6월 1일, 하관 예배로 장례를 치렀다. 망월동 구묘역에 묻혀 있다가 1997년 5월 4일, 광주 YWCA 김경천 사무총장이 입회, 식골한 가운데 유골을 거두어 신묘역으로 이장, 앞줄에 윤상원, 뒤에 박관현이 누워 있는 곳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98년, 형을 삼았던 김영철이 한참 뒤에 눕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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