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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관현 ]
제목 민주학원의 새벽 기관차-양강섭- mail 등록일 2010-09-16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1031
민주학원의 새벽 기관차

양강섭(박관현 장학재단)


박관현 열사는 1953년 6월 19일(음력)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쌍운리에서 농사를 짓는 아버지 박정한씨와 어머니 이금녀 여사 사이에서 5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 집은 가난하기 이를 데 없어 고구마밥, 쑥밥, 무밥으로 끼니를 이어가기 일쑤였다. 광주에서 중학교를 다니면서부터는 방학이나 휴일에 고향에 돌아가면 꼭 할아버지와 한 이불을 덮고 자면서 할아버지 말씀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모든 사람은 다 평등한 것이다. 거지라도 사람 대접을 해야 한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부모를 몰라보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조상 섬김에 조금도 소홀해선 안된다.” 할아버지는 6대 종손인 관현에게 늘 이렇게 사람의 도리를 말씀해 주셨다.
관현의 할아버지는 비록 학교 교육을 받지는 못하셨지만, 옛 성현들으 가르침이나 고사를 많이 알고 계셨고, 유머가 풍부하셨다. 관현이 풍부한 유머 감각으로 좌중을 압도하고 누구와도 잘 어울리며, 고사성어에 얽힌 교훈적인 이야기를 자주 인용했던 것은 할아버지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된다.
고교 3학년 때의 일기를 보면, “생활의 규칙성을 무질서하게 흐트려 놓고서도 뻔뻔스럽게 ‘어쩌다 보니, 어쩔 수 없으니까’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잘못을 감추려고만 한다면 인간이 어찌 인간답다고 하겠는가? 이런 생활 태도 때문에 결국은 인간생활이 점점 어둠 속을 헤매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쓰고 있는데 이러한 그의 생각은 가계를 꾸려 나가기 위해 삯바느질에서 행상, 날품팔이 등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시며 억척같이 살아오셨던 어머님의 근면성실에 영향을 받은 바 컸다고 생각된다.
그가 고등학교 3학년이던 가을에 이른바 유신헌법이 선포되었는데
유신체제 선포의 배경과 정당성을 설명하던 일반사회 과목 담당 선생님에게 “선생님! 학생들의 이성을 흐리게 하지 마십시오. 유신체제가 그렇게 정당하다면, 왜 계엄령을 선포하고 강제로 성립시키려 합니까? 왜 언론의 자유가 없고 정의를 주장하는 학생들이 공부하는 대학에 휴교령을 내립니까? 그것은 유신체제가 정당하지 않다는 증거입니다.”라고 그 부당성을 설파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1977년군을 제대한 그는 1978년 3월에 전남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대학사회의 자유롭고 진지한 분위기에 접하면서 그는 우리 현실의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자주 갖게 된다.
고교시절 유신선포의 부당성에 대해 느꼈던 분노. 캠퍼스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모여 토론하는 사회현실, 그들을 지켜보는 불온한 눈길을 사나이들, 풍문으로 들려오는 서울에서의 대학생 시위 소식들, 분명히 이 땅 에서 사라져야 할 불행이긴 하지만 그 혼자서는 어쩔 수 없는 거대한 철벽으로 여겨져 해결의 방향은 막연하기만 했다. 아니 어쩌면, 이러한 현실들은 그가 목표로 삼고 있던 고시합격 이후에 생각해 볼 문제로 여겨 애써서 뒤로 미루어 두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양강섭과 정용화를 만나고 곧바로 의기 투합한 셋은 만날 때마다 치열한 논쟁을 벌인다.
관현이 처음으로 격동하는 역사의 움직임 앞에 서게 된 것은 바로 1978년 ‘6.29 교육지표’사건을 통해서이다. 유신체제의 질곡 속에 굴종하여 살기보다는 분연히 일어나 그 체제를 부정하기 위해 스승과 제자들이 한뜻이 되어 이루었던 성난 물결에 한무리가 되면서 격렬한 외침들이 이제 자신의 외침이 된 것이다. 교육지표 사건을 겪으면서 관현이 가슴속에는 알지 못할 분노와 허탈이 자리하게 되었다. 친한 친구들이 교정을 떠나간 지금 함께 고뇌를 털어놓고 이야기할 상대도, 괴롭게 방황하는 그를 붙잡아줄 손길도 없는 것 같았다.
1978년이 다 저물어 가는 12월 어느 날, 관현은 가톨릭농민회가 주최하는 쌀생산자대회에 참석하게 된다. 농부의 아들인 관현에게는 대회에 참가한 농민들은 곧 그의 부모이며, 이웃이었다. 그들이 외치는 민주농정, 농민권익 보장, 생산비에도 못 미치는 쌀값 인상, 농협의 민주화 등의 함성을 들으며, 그들이 바로 이 땅을 지키고 살아온 이 땅의 주인이라는 생각이 성큼 다가왔다.
이 땅의 민중들의 모습과 그가 하나로 되는 것을 느끼면서 그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며 중얼거렸다. ‘우리의 이 힘이 바로 역사를 움직여 가는 거야.’ 이제 억압과 핍박의 사슬을 기어이 끊어 내고야 말겠다는 용기와 희망이 솟구친 것이다. 이제 그는 이러한 스스로의 다짐을 행동으로 옮겨가게 된다.
1978년 12월 17일부터 1979년 2월 20일까지 관현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광주공단실태조사보고서⌟는 79년 5월에 이르러 4차례에 걸쳐 전남대학신문에 전남대학교사회조사연구회 명의로 연재하기로 계획되었고, 실제로 첫째 주와 둘째 주 두 차례에 걸쳐서 연재되었다. 그러나 연재된 내용이 주는 파문은 학원은 물론 사회 전반에 실로 엄청난 충격으로 번져나가 이를 애써 외면하려 했던 각 일간신문에서도 보고서 내용을 발췌해서라도 보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대학신문의 연재는 중단되었고, 실태조사반원 수명이 연행되었다. 이 실태조사반을 근간으로 사회조사연구회(약칭 ‘사조회’)가 창립되고, 관현은 사조회 활동에 적극적인 한편, 들불야학의 강학으로도 참여하여 민중들과 생활을 같이 하게 된다.
1980년 4월 전남대학교 총학생회 회장선거에 ‘민주학원의 새벽기관차’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입후보한 관현은 압도적인 표 차이로 총학생회 회장에 당선된다. 학내적으로는 총학생회 쟁취, 학내 비민주적 요소 및 유신잔당의 척결, 어용교수 퇴진, 병영집체 훈련 거부 투쟁을 주도하며 여기서 결집된 역량을 바탕으로 이원집정부제 거부, 민주적 권리 쟁취, 계엄령 해제 등등의 대 사회투쟁으로 전환해 나갔다.
한편 5월초 총학생회 임원진을 새로 개편하고 집행부와는 별도로 송선태를 중심으로 한 비밀기획실을 구성하는 등 강력한 민주화투쟁을 위한 진용을 갖춘다.
5월 14ㆍ15ּㆍ16, 3일간에 걸친 도청 앞 분수대에서의 민족민주화성회는 5ㆍ18 민중항쟁의 토대가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며, 이 집회를 주도했던 박관현은 그 유명한 연설과 리더쉽으로 광주 시민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전두환을 비롯한 군부독재집단에 의해서 내란중요임무종사자로 수배되어 봉제공장의 공원으로 위장하여 도피생활을 하던 중 1982년 4월에 체포되어 광주교도소에 수감된다. 관현은 수감 중에 세 차례에 걸쳐 재소자에 대한 비인간적인 처우개선, 정치범에 대한 차별대우 금지 등을 요구하며 50여 일 동안 단식투쟁을 감행하였다.
이로 인해 급성심근경색이라는 병에 걸려 1982년 10월 12일 새벽 2시, 전남대 병원에서 산화했다.
관현의 죽음이 엄청난 사회적 파장으로 번질 기미를 보이자 군부정권은 전무후무한 시신탈취작전을 전개하여 그의 고향인 영광으로 강제 이송하였다. 이를 계기로 전남대에서는 80년 이후 최대의 시위가 연일 이어졌고, 학생운동이 새로운 활로를 마련하게 되었다.
1987년 11월, 박관현 열사를 망월 묘역으로 안장해야 된다는 여러 지인들의 결의로 이장을 하기 위해 영광 불갑의 묘지에 있는 열사의 유골을 보고 여기에 참여했던 수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통 3년이면 육탈이 된다는데 박열사는 5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등쪽의 살이 뼈와 분리되지 않고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이장과정에서 우리는 또 한번 분노에 치를 떨어야 했다. 저 악랄한 군부독재 집단은 모교인 전남대학에서 노제를 지내고 나오는 이장 행렬에서 하늘을 뒤덮을 듯 한 최루탄을 쏘아대고 유골이 실려 있는 영구차 안에까지 최루탄을 난사하여 유골을 탈취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1980년 이후 7년 만에 관현은 수배, 수감, 산화라는 시간을 가지고 결국은 죽음으로써 5월 영령들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1997년 4월 망월 신묘역에 이장하여 동지들과 함께 영면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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