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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영일 ]
제목 민주주의를 위해 불꽃처럼 살다 간 애국청년-김전승- mail 등록일 2010-09-16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1489

민주주의를 위해 불꽃처럼 살다 간 애국청년

김전승(신영일을 생각하는 모임)


통기타를 좋아한 학생
신영일은 1958년 10월, 나주시 남평면에서 아버지 신만원님과 어머니 김순례 여사의 3남 1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광주로 이사하여 중흥초등학교, 북성중학교를 거쳐 1973년 광주제일고등학교에 입학한다. 고등학교 시절 1학년 때는 키가 작고 매우 내성적이었는데 2학년이 되면서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고 매우 활발한 상격으로 변하였으며 기타를 치며 여학생을 꼬시는 발랄한 학생이었다.
1976년 대학입학에 실패하고 재수 시절에 ‘갈매기의 꿈’을 읽고 친구들과 함께 ‘조나단’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갈매기 조나단의 밤’이라는 자선음악회 형식을 빌어 일일찻집을 열기도 했다. 1977년 1년간의 재수시절을 마치고 훌륭한 교사가 되겠다는 벅찬 꿈을 안고 전남대학교 사범대학 국사교육과에 입학하였다.
대학에 입학해서도 통기타를 치며 대학가요제에 자작곡을 만들어 참가하기도 했다. 이런 취미가 후에 들불강학이 되어 학당가를 짓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학생운동에 참여하다
신영일은 대학에 입학하여 ‘독서잔디’라는, 사회과학 서적을 읽고 토론하는 독서동아리에 가입하여 활동한다. 이 동아리 활동을 통해 ‘전환시대의 논리’, ‘민중과 지식인’,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등의 책을 읽으면서 그 동안 학교에서 받아 온 교육의 한계를 느끼고 한국사회의 현실과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동아리 활동 과정에서도 신영일은 틈만 있으면 동료들과 함께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낭만적인 대학 생활을 꿈꾸지만 2학년이 되면서 전국 각지에서 유신정권에 반대하는 성명서가 발표되고 종교계나 지식인 사이에서 대중강연을 통해 반유신 투쟁이 고조되고 있었던 상황에서 그는 결코 현실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특히 1978년 6월 27일, 전남대 송기숙 교수를 비롯한 11명의 교수들이 서명한 ‘민주교육지표’ 선언문이 발표되고 서명교수들이 모두 경찰에 연행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간이 학생들에게 알려지면서 6월 29일 전남대 도서관에서 노준현, 문승훈을 중심으로 많은 학생들이 농성에 들어가게 된다. 이 때 신영일은 이 농성투쟁에 참여하여 노래를 지휘하고 선창하면서 농성장이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데 큰 몫을 담당한다. 이 사건으로 신영일은 서부경찰서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훈방으로 풀려났지만 학교로부터 무기정학 처분을 당한다.

‘들불야학’의 강학이 되어
6.29 사건으로 학교로부터 쫓겨난 후, 신영일은 당시 야학을 준비하고 있던 박기순, 임낙평 등과 함께 광천동 천주교회 교리실을 중심으로 전개된 들불야학의 강학으로 참여하게 된다. 야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신영일은 학당가를 직접 작사 작곡하고,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채소 판매를 하는 등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국사를 담당하는 강학으로 학생들을 가르칠 교재를 직접 작성하여 필경을 하는 등 모든 역량을 쏟아 부었다. 이때 윤상원, 김영철 선배를 만나면서 그 선배들의 민주에 대한 사랑, 광천동 주민운동에의 열정 등을 보게되었고, 이들은 이후 신영일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1978년 7월말, 드디어 40여 명의 노동자, 학생들이 참여한 가운데 입학식을 거행하였고 노동자, 학생들에게 국사를 가르치며 역사 의식을 불어넣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때로는 학당에서 체육대회나 행사를 할 때면 언제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등 적극적인 분위기를 이끌어 나가곤 했다.
1978년 말, 들불야학이 어느 정도 기틀을 마련하면서 윤상원, 최기혁, 장석웅 등의 선배들로부터 실태조사를 해 보자는 제안을 받고 그 해 가을부터 설문지를 작성하는 등 준비작업에 들어갔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들불노동자들이 도움과 조사팀의 결의로 겨울방학이 끝날 무렵 조사사업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 조사활동 과정에서 국사교육과 선배이자 동료강학이었던 박기순 열사가 1978년 12월 24일 숨진 사건이 있었으며, 이 시기에 또한 당시 전대 법대 1학년이었던 박관현 선배를 만나 조사활동을 함께 하였다.

다시 학생운동가로
1979년 3월, 대학은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었고 신영일은 3학년이 되어 학교로 돌아왔다. 들불야학이 강학들과 공단 실태조사를 함께 했던 선후배들은 전남대 학생운동의 중심적인 역학을 맡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 학생운동은 사회과학 동아리 중심에서 사회문제에 관한 실질적인 접근을 위한 동아리로 변화하는 흐름이 있었는데, 그때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 바로 공단실태 조사팀이 중심이 되어 만든 ‘사회조사연구회’였다. 신영일, 박관현 등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이 연구회 성격을 동아리는 당시 기독학생회의 다른 이름인 ‘성경과 찬송’, ‘가면극 연구회’로 바뀐 탈춤반과 함께 학생운동을 전개하는 동아리의 변화를 촉발하였으며, 연구회 운영방식에 있어서도 보다 체계적인 접근을 시도하게 되었다.
이때 신영리, 이세천, 장석웅 등은 학생운동의 올바른 방향과 효과적인 지도를 위해 노력하기로 하고 분사니되어 있던 동아리들을 하나의 힘으로 모으는 역할을 맡게 된다.
이때 신영일은 교육, 역사, 사회조사팀 등의 조직을 꾸리고 지도하는 일을 하여 각 동아리들이 학습과 활동, 학생운동 전체의 흐름에서 하나의 일관된 체계를 갖도록 유도하였다.
당시 학교 분위기는 유신독재정권의 말기 상황이라서 경찰이 학교에 상주하여 학생들을 감시하고 끊임없이 동정을 파악하면서 요주의 학생에 대한 사찰을 강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족들에게도 많은 심리적 압박이 되었으며 특히 이미 무기정학을 받은 바 있는 신영일로서도 무척 어려운 상황이긴 했지만 학생운동의 질적 발전을 위한 열성을 대단했다.
2학기에 들어 다른 대학들의 반유신 투쟁의 영향으로 학교도서관 화장실의 낙서 사건, 유신정권에 반대하는 편지 사건 등으로 분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10월 중순 마산과 부산에서 학생, 노동자들의 시위사건이 발생하자 전남대학교에서도 무슨 일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고희숙, 박유순, 김정희, 김경희 등 4명의 여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당시 학생운동의 사찰기관의 중심이었던 상담지도관실을 방화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신영일은 서부경찰서에 연행되어 심한 구타와 고문을 당하면서 자백을 강요당했는데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아 경찰로부터 독종이라는 소리를 들은 만큼 강인한 인내심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당시 신영일은 심한 구타와 고문으로 허리와 다리를 다쳐 이후 생활에 큰 어려움을 겪었으며 심각한 후유증을 겪기도 했다.
10.26사건으로 풀려난 신영일은 유신독재정권이 물러난 상황에 대비하여 장기적인 학생운동의 발전 전망에 대한 사명감을 갖고 학생운동의 질적 발전을 꾀하는 한편 학내 민주화를 위한 총학생회 부활을 준비하는 팀들과 정보를 교류하면서 새로운 학기를 준비하였다.
개하겡 대비하여 학생운동의 발전을 위한 몇 가지 전략은 전남대 학생운동의 발전에 ;매우 ;의미있는 것이었는데,
첫째, 지난해부터 연구회 중심의 동아리를 보다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하며, 우리사회의 구조적 모순이라 할 노동자, 농민, 경제, 통일 등의 주제를 탐구하는 연구회와 연극, 민속극, 철학, 교육, 사회조사 등 전공 또는 기능과 연관된 사회과학 연구를 통한 문제의식을 집중적으로 학습한 동아리를 조직, 발전시켜야 하며,
둘째, 유신독재정권이 물러갔지만 12.12 쿠테타로 신군부의 등장이 우려되는 상황에 학생운동 역량은 연구회를 중심으로 강화하는데 집중할 필요가 있고,
셋째, 향후 운동이 명확한 주체 없이 대중투쟁 일변도로 흐르지 않게 하려면 보다 적극적인 활동가를 양성하는 데 힘을 쏟고 이를 사회과학동아리의 활성화와 학습 커리큘럼의 체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 내용으로 1학년 때 시각 교정과 역사의식의 확보, 2학년 때는 정치 경제학과 한국 근현대사의 학습을 통한 운동가로서의 사명감 인식, 3학년 때는 후배 지도, 4학년 때는 실천적인 운동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학생운도의 체계화를 시도하였다.
이러한 내용의 학생운동 일반에 관한 관점을 정리한 신영일은 80년 ‘민주화의 봄’이 몰고 온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의 활동과 총학생회의 부활과정에서 일어난 ‘어용교사 퇴진투쟁’ ‘병역집체훈련 거부투쟁’등의 교내시위 현장에서 대중투쟁 과정을 지도하는 한편 연구회의 부활과 학생운동의 체계적인 학습에 심혈을 기울이며 후배들을 지도해 나갔다.
한편으로 4월에 있었던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들불강학과 공단실태 조사를 함께 했던 박관현 선배가 학생회장으로 당선되어 총학생회에 서 함께 일할 것을 제안하지만 학생운동의 발전을 위한 일념으로 거절하기도 한다.
신영일은 학교에서 계속하여 민족민주화 대성회 등 학내외 시위사건의 핵심에서 운동의 전과정을 지도하는 데 열정을 쏟는 동안 신군부의 집권 시나리오인 5.17 군사쿠테타와 광주민중의 저항이 폭발한 5.18 광주민중항쟁을 맞게 된다.

폐허 위에서 일권낸 학생운동의 새로운 전망
5.18 항쟁기간 동안 신영일은 금남로나 시내 전역에서 연일 벌어지는 대중 시위를 전해 듣고 이 상황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동료들은 함께 할 것을 요구하지만 필연적인 패배로 귀결될 싸움에 뛰어드는 것이 맞는 것인지 고민을 거듭한 끝에 항쟁이후를 대비하기로 결심하였다. 결국 5.18 광주민중항쟁은 10일간의 투쟁을 통해 사망자와 부상자, 구속자를 양산하고 신군부의 총칼아래 짓밟힌 채 막을 내리고 학교는 장기간 휴교 상태에 들어갔다.
많은 동료들 특히 존경하는 선배였던 윤상원, 박용준 등이 항쟁기간에 죽었으며 들불의 강학과 학생들이 대거 구속된 상황에서 신영일은 함께 하지 못한 미안함과 그들의 유지를 받들어 이후를 준비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다시 학생운동을 추슬러 나가기 시작하였다.
1980년 9월, 휴교령이 풀리고 개학과 동시에 연구회의 부활을 위해 힘을 쏟는 한편, 학생운동이 이제 단순히 민주화를 위한 투쟁이 아니닌 미제국주의와 파시스트정권에 대항하는 전위부대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입장을 확고히 갖게 되었으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이론으로 무장하고 장기적인 항전을 준비하는 운동가를 양성하는 게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하여 이를 실천에 옮겨갔다. 그러나 계엄령하에 있었기 때문에 1학기에 만들어진 연구회들을 ‘반’으로 등록하여 합법성을 유지하는 한편 운동방향을 정립하고, 드러나지 않게 지도부를 구성하여 전체적인 방향을 지도하고자 했다.
이 시기 5.18의 영향으로 패배주의에 빠져 있던 선후배들을 설득하여 학생운동의 체제 내에서 새로운 운동의 방향을 제시하고 충실한 학습과 장기전에 대비하여 사회운동에로의 이전 문제까지 폭넓게 운동을 전개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해 겨울에는 고희숙, 김정희, 김경옥, 김전승 등과 함께 학생운동 일반론과 체제에 대한 이론을 정립하고 운동의 질적 발전을 위한 사회과학 커리큘럼을 완성하였으며, 일회적인 시위나 선동으로 대중을 설득할 수 없다는 걸 분명히 하고 사상무장을 통해 민중진영과 함께 반제.반파쇼 전선을 확대하는 것이 학생운동의 중요한 방향임을 설파였다.
1981년 들어 5.18 1주면을 맞이하여 전남대 학생운동 내에 중요한 논쟁이 일어났는데, 추모시위를 둘러싸고 학생운동 그룹이 전혀 움직임이 없자, 이에 실망한 선후배들이 신영일의 입장을 공격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런 상황에서도 신영일은 끈질기게 일회적 시위에 반대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여 운동의 역량을 보존하고 장기전에 대비한 학습과 운동 전체의 질적인 발전을 꾀하고자 했다.

반제반파쇼민족해방 학우투쟁선언

1981년 5월 투쟁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지나갔고 신영일은 그 해 여름 학기에 졸업을 하게 된다. 졸업 이후의 진로를 놓고 자신이 정리해온 입장대로 사회운동에 진출하기 위해 교사운동을 하면서 할 것인가 아니면 반제.반파쇼 전선을 확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선언하고 민중운동을 지향하는 삶을 살아갈 것인가 고민한 끝에 임낙평, 이광호 등과 함께 9월 29일 전남대 식당에서 ‘반제 반파쇼 민족해방 학우투쟁선언문’을 낭독하고 시위에 들어간다. 물론 이 시위사건을 준비하기 위해 그 동안 자신의 주장을 담은 유인물을 작성하고 직접 등사하여 메가폰을 구입하고 치밀하게 시위의 흐름까지 사전에 계획하였다.
또한 이 시위는 5.18광주민중항쟁의 유산으로 이 지역 학생운동의 방향에 관한 명확한 선언을 하고자 했던 신영일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으며 당시 학생운도의 후배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또한 5.18 1주기 추모시위와 관련하여 논쟁이 붙었던 ‘준비론’과 ‘투쟁론’에 대한 자신의 화고한 입장을 표명한 것이기도 했다.
이 시위사건으로 신영일은 장기간 도피생활에 들어갔으며 6개월여만에 자수 형식을 빌어 서부경찰서에 구속되었다. 광주교도소에 수감된 신영일은 미결 독방에서 박관현 선배를 만나게 된다. 교도소에서 만난 두 사람은 새로운 환경에서도 민주화의 의지를 꺾지 않고 5.18 진상규명과 교도소내의 비민주적인 관행, 재소자들의 인권 문제에 대한 투쟁을 전개한다.
이 투쟁은 갇혀 있는 상태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단식 등의 극한적인 투쟁으로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1982년 5.18 시기에는 진상규명 요구등 격렬한 단식투쟁과 이에 대응하는 교도소 당국의 폭행, 억압 등으로 치명적인 건강악화를 가져왔으며 급기야 10월 12일. 박관현 선배가 심근경색으로 사망하기에 이른다.
이에 따라 신영일도 형집행정지로 풀려나 요양 생활에 들어간다.

청년운동가로 우뚝 서다
장기간 단식투쟁과 교도소의 독방생활로 망가질 대로 망가진 육신을 요양한 지 1년여만에 다시 일어선 신영일은 1984년 초 매월 18일이면 보여 왔던 5.18인사들의 모임에서 새로운 운동의 활력을 찾아 정동년 선배와 함께 ‘구속자협의회’를 창립하고 간사를 맡아 활동한다.
그 후 서울에서부터 ‘민청련’활동을 전해들은 이 지역 청년활동가들과의 만남을 통해 청년활동가들을 중심으로 민주화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심하고 정상용, 김종배, 정용화, 송재형, 장갑수 등과 함께 1984년 11월18일, 전남민주청년협의회(전청협)의 창립을 주도하고 홍보부장으로 활동한다. 이 전청협은 전남민주주의청년연합(전청련)으로 이름이 바뀌는데 전청련에서 신영일은 지역운동의 이론을 정립하고 지역사회 실태조사활동, 대중적인 조직활동 등 5.18 투쟁, 민중생존권투쟁, 민주화를 위한 다양한 시위 등 모든 면에서 열성적인 활동을 전개한다.
특히 운동 이론을 제시하고 알리기 위해 ‘광주’라는 기관지를 창간하고 발행했으며, ‘광주의 소리’라는 대중적인 소식지를 발생하여 5월운동, 민중생존권문제, 미국문제 등 다양한 소식을 시민대중에게 제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1985년 5.18 투쟁 이후 조직을 재편한 전청련은 전남사회운동협의회(전사협),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에 가입하여 연대활동에 참여하면서 광주 ㆍ전남에서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활동에 깊이 관여한다.

개헌투쟁의 전국화에 나서다.
1986년 들어 전두환 정권에 대항하는 민주화운동 진영의 역량이 커지면서 신민당은 직선제 개헌을 들고 나와 전지역을 돌며 개헌추진 현판식을 거행하기로 하고 3월 30일 광주에서 식을 진행할 계획이 알려졌고 전청련은 이 기회를 민주헌법쟁취투쟁의 기폭제로 삼을 것을 결정하고 준비를 하였는데, 이 투쟁이 바로 3.30 개헌투쟁이었으며 이후 5.3 인천항쟁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대중투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 시위사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신영일은 남의 행사에 우리가 나서는 건 모양이 좋지 않다는 반대의견에 대해, 대중은 민주화를 요구하고 있으며 수만 명이 금남로에 집결할 것이 예상되는데 이에 대한 대비를 하지 못하면 운동가로서 옳지 않은 행동이라는 것을 역설하는 등 밤을 세워 치열한 논쟁 끝에 ‘민주헌법 쟁취’라는 우리의 주장을 담은 ‘광주의 소리’를 제작하고 대중시위를 적극적으로 이끈다는 데 합의하였다.
3월 30일 개헌추진 현판식 행사는 경찰의 저지로 무산되었지만 그때 모인 시민들 앞에 YMCA옥상에 등장한 신영일은 특유의 몸짓으로 민주헌법 쟁취를 역설하면서 노래와 선동을 이어나갔다. 이에 금남로에서는 정순철, 김전승, 위성삼 등의 전청련회원들과 간부들이 요소요소에서 시위를 주도하며 대인동 터미널에까지 옮겨갔다 다시 금남로 도청 앞으로 이어지는 시위를 밤 12시까지 이어갔다.
이 시위사건으로 수배를 받은 신영일은 4월 5일에 있을 대구시위의 현장으로 달려가면서 대구 민통련과 연계하여 광주의 경험을 전달하고 직접 그곳에서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이런 개헌투쟁의 열기를 모아 전국적인 관심을 모은 5.3인천시위를 대대적으로 준비하였는데 민통련의 전 역량을 모아 인천에서 군사독재정권과 한판승부를 벌일 것을 결의하고 준비에 들어갔는데 이 준비과정에서 신영일은 논리와 경험은 민통련의 지도부를 움직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인천 5.3시위는 이렇게 민통련의 전국역량이 결집하여 전두환 군부독재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지만, 이 시위사건으로 광주지역의 정상용, 정동년 등의 선배들이 구속되기도 했다.
이런 개헌투쟁의 성과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가 탄생하였으며, 이후 국본의 투쟁 성과는 1987년 6.10 민중항쟁으로 이어졌다.

대중청년운동의 깃발을 들고
이 인천사태의 영향으로 전청련의 주요 간부들은 대부분 수배상태였지만 수배 중에도 지속적으로 만나 전청련 활동의 진로와 투쟁에 대해 협의를 진행하였다.
1987년 들어서 수배가 해제되고 다시 일선에 복귀한 신영일은 생활 속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하기 위해 직장에 들어가서 낮에는 직장생활을 하고 밤에는 전청련에서 활동하는 생활을 시작하였다. 또한 새로운 조직체계로 ‘광주지역위원회’를 구성하고 부위원장이 되었으며 조직내부를 생산직청년반, 직장청년반, 여성반, 시사토론반, 학생반 등 청년들의 이해와 요구를 중심으로 재편하는 한편 목포, 순천, 나주, 보성 등의 지역에전청련 지역위원회를 건설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지역을 순회하면서 지역청년들에게 청년운동의 필요성을 설파하였다. 이 때 조직변화의 필요성과 대중청년들의 참여를 위한 ‘전청련의 올바른 발전을 위하여’라는 문건을 제작하여 전청련 조직의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대중조직의 건설을 통해 전청련은 대중투쟁의 과정에서 회원들을 모으고 이 회원들이 다시 밤 늦게까지 토론하는 과정을 가져가면서 대중조직으로서의 조직 위상을 정착시켰으며, ‘청년학교’라는 민주시민교실을 운영하여 8기까지 진행하였는데, 이 청년학교는 일반 청년들을 민주적 의식을 갖게 하고 활동가로 성장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전청련은 1987년 12월에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조직된 청년대중을 모아 당시 김대중 후보를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차원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당선투쟁’을 전개하였으며, 김대중 당선을 위한 청년모임을 건설하는 데 주력을 모았다.

병마와 투쟁을 끝으로
신영일의 기대와는 달리 1987년 대선은 패배로 끝났다. 대선 패배 후 전청련의 진로와 관련한 내부의 논의는 매우 심각하게 진행되었는데, 논의는 청년대중운동으로서 대중활동을 어떻게 전개할 것인가의 문제에 집중되었다. 이런 논의과정 속에서 신영일은 직장생활을 포기하고 재정사업과 대중사업을 함께 전개할 것을 결정하고 새롭게 조직을 추슬러 나가는 데 역점을 두고자 했다. 전청련의 조직 복원과 활동 전망을 세우는데 매일 늦게까지 토론을 전개하면서 많은 고민을 한 탓에 몸은 몹시 쇠약해져갔다. 1984년 이후 공개적인 대중활동과 청년운동의 일선에서 한차례의 휴식도 없이 달려온 운동가로서 숙명처럼 병마가 그를 에워싼 것이다.
1988년 4월 어느 날 아침, 몸이 몹시 좋지 않다고 말하면서 병원에 다녀와야겠다고 말하고 나간 신영일은 장티푸스 즉 열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때만 해도 주위사람들은 큰 병이 아니라고 믿고 곧 털고 일어나리라 생각했는데 점점 병은 악화되어 급기야는 5월 9일, 민주주의를 애타게 바라면서 불꽃처럼 치열하게 살아 온 애국청년 신영일은 수많은 선후배들이 애도하는 가운데 30세 일기로 친지들의 곁을 영원히 떠나게 되었다.
신영일은 우리가 지향하는 이상을 실현하는 데 개입하는 잘못된 관념과 사고, 현실론에 입각한 정연하지 못한 이론에 대해서 때로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열정으로, 때로는 비타협적인 투쟁으로 돌파하고 자신의 논리와 이론을 관철시켜 운동의 발전을 일궈 나갔지만, 운동 관정에서 당한 고문과 부상, 단식투쟁의 후유증, 오랜 세월 쉼없이 전진해 오면서 얻은 누적된 피고 등이 겹쳐 자신의 육신에 침투한 병은 막아내지 못하고 부모님은 물론 부인 김정희, 아들 새벽이와 특히 돌도 지나지 않은 누리를 곁에 두고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남아있는 사람들은 5월11일 ‘애국청년 고 신영일 열사 민주시민장’으로 도청 앞을 경유하면서 끝내 민주세상, 해방세상을 보고 떠나지 못한 영혼을 추모하는 성대한 장례식으로 신영일을 저 세상으로 떠나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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