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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철 ]
제목 노동자와 함께 한 주민운동가 mail 등록일 2010-09-16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1407
노동자와 함께 한 주민운동가

전용호(작가, 들불야학 2기 강학)

출생과 성장
김영철은 1948년, 순천에서 아버지 김경묵 씨 (교사였는지는 불확실하다)와 어머니 박은혜씨의 3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경묵씨는 기독교 사립재단인 매산학교, 어머니는 현재도립병원의 전신인 안록산병원의 간호사로 두 분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부모님은 자녀들에게 절대 정직, 절대 무사, 절대 순결을 강조하였고 박력있고 활달한 사람, 지덕체의 소유자가 되도록 가르쳤다.
그가 태어나서 2년쯤 되던 즈음, 어머니는 자식들을 데리고 목포 모자원으로 이사를 하였다. 부친이 여수와 순천을 중심으로 일어난 ‘여순 사건’에 연루된 것이 그 이유였다. 어머니가 가족의 안전을 위하여 취한 조치였던 것이다. 모자원은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모자가족을 구호하는 일종의 난민보호소였다.
김영철이 다섯 살이 되던 해, 어머니는 광주 모자원의 총무로 취직을 하여 가족들은 다시 광주로 옮겼다. 당시 광주모자원은 서경자씨가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김영철 가족은 한동안 모자원에서 살다가 김영철이 중학교를 다닐 때쯤, 형제들은 모자원 근처에 방을 얻어 자취를 하였다. 정부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는 모자원이었지만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아이들의 생활은 항상 곤궁하였다. 김영철은 모자원의 아이들과 동고동락하며 사랑의 신념을 키워 나갔다.
그는 광주서석초등학교에 다녔다. 그가 초등학교 6학년이던 1960년 3.15부정선거로 전국이 술렁거렸다. 그는 시위군중을 따라다녔으며 그 기억은 어린 그에게 정치적 각성의 계기가 되었다. 그는 서석초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명문인 광주서중학교와 광주제일고등학교에 진학을 하였다. 광주제일고등학교는 호남의 명문으로 졸업생 대부분은 대학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그는 집안 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공무원 시험을 치러서 전남 승주군 별량면 사무소로 발령이 났다. 하지만 그는 면사무소와 농협의 비리에 통탄, 1년도 채우지 못하여 사표를 내고 군대에 가고 만다.
그가 군복무 기간 중이던 1971년, 광주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는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1972년, 그는 제대를 하였지만 광주로 돌아가지 않고 서울에 자리를 잡았다.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었던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아 그는 돈 한 푼 없는 고아나 다름없었다. 그는 낯선 타향인 서울에서 막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독서실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청과물 장사나 포장마차를 하거나 신문보급소의 총무, 목장 잡부, 우산 팔이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동생인 김종철도 제대를 하고 그와 함께 생활을 하였다. 이 때 이미 그는 살아갈 삶의 방향을 소외 받은 사람들과 함께 평생을 살기로 결심했던 것 같다.

지역개발운동에 투신
그의 생각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은 신용협동조합지도자 교육이었다. 신용협동조합운동은 1949년 독일에서 고리채 추방과 농민의 자립을 위한 저축운동으로 시작되었다. 한국에는 1960년 부산과 서울에서 시작하여 1972년 정부에서 정식으로 신협법이 제정되면서 1970년중반 이후 전국 각지로 빠른 속도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광주. 전남의 신용협동조합운동은 전남협동개발단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전남협동개발단은 단장에 조아라 광주 YWCA회장, 부단장에 광주영신영아원 서경자 원장, 그 외에 장두석 씨 등 지역 개발운동을 하시는 분들이 참여한 단체였다. 김영철을 전남협동개발단과 인연을 맺어주신 분은 서경자 부단장이었다. 김영철 가족과 서경자 원장은 각별한 사이였다. 그의 가족이 목포에서 광주로 처음 왔을 때 광주모자원 원장으로 인연을 맺기 시작하여 어머니가 마지막 임종할 때까지 옆에서 지켜 주었던 분이 바로 광주 영신영아원 서경자 원장이었다. 그는 서경자 원장을 이모라고불렀으며 서경자 원장도 그를 치조카보다 더 아꼈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려고 하는 김영철의 심성을 눈여겨 보며 그가 능력을 발휘할 일터를 찾고 있었다.
서경자 원장은 신용협동조합운동이야말로 김영철이 참여하여 활동할 수 있는 적합한 곳이라 생각하였다. 그는 서경자 원장의 권유로 1976년 1월 7일부터 24일까지 2주일에 걸친 제 51차 신용협동조합지도자교육에 참여를 하였다. 신협지도자 교육은 공동체운동 이념 외에도 회의 진행법, 토론법, 능력개발 훈련, 여가선용 놀이, 신협부기 등 지도자 양성을 위한 다양한 내용으로 진행되었다.
그가 처음 신협지도자 교육을 받던 즈음에는 전남협동개발단이 펼쳐지는 농촌계몽운동에 참여하려는 생각을 하였던 것 같다. 1976년 2월, 그는 오누이처럼 사귀어 오던 김순자 씨와 순천에서 결혼하였다.
그는 결혼을 계기로 5년 여의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승주군 별량면에 신혼 살림을 차렸다. 그는 우선 건축 일이나 염전 일을 다니면서 생활을 꾸려갔다. 1976년 8월, 첫아들 동명이가 태어났다. 77년 1월, 그는 승주별량 첨산신협 창설의 일환으로 실시하는 순천중앙교회 신협 지도자 교육을 유치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순천의 교육은 그의 동생인 김종철까지 포함하여 약 70여 명이 참여하였는데 강사로는 박이섭 원장, 송보경, 박성호, 박용덕 씨 등이 참여하였으며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광천동 시민아파트와 들불야학
1977년 2월, 순천 신협지도자 강습회 추진과정 등에서 그의 적극적인 활동이 인정을 받아 그는 전남협동개발단 간사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광주 YWCA신용협동조합의 참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당시 전남협동개발단은 빈민지역인 광천동 시민아파트 주민지역발전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77년 2월, 그는 광주 학동의 영신영아원으로 이사를 하였다.
강천동 시민아파트는 6.25 직후의 피난민과 부랑인을 위해 시에서 지었지만, 이름만 아파트지 판자촌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가 처음 그곳을 찾아갔을 때의 심정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ㅣ
“사방 군데군데가 쓰레기장이었고, 아파트 복도는 암굴처럼 어두웠고, 내부 벽은 매우 더러웠으며, 공동화장실은 수세식이 아니어서 냄새와 메탄가스로 눈이 따가웠다. 놀이터가 없어 어린이들은 부서진 리어카 위에서 난폭하게 놀고 있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서른 살이었다. 그는 1977년 10월, 주민들과 직접 생활하기 위해 학동의 영신영아원에서 시민아파트 A동 216호로 이사를 하였다. 그리고 1980년 5월 항쟁으로 그가 구속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는 먼저 아파트의 주민들을 종교별, 학교별, 직업별로 나누고 175가구의 각 호마다 수입, 지출, 부채 등의 기초조사표를 만들어 종합개발사업 계획안을 만들었다. 그리고 청년회를 부활시켜 총무를 맡고, 청년부 산하에 청소년부를 두어 어린이 주말학교 운영과 아파트 대청소를 실시하였다. 어린이들의 이름을 외워 아침마다 청소하자고 불렀으며 청소가 끝나면 인근 효광여중 운동장에서 축구시합을 하였다.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에는 어린이 주말학교를 아파트 옥상이나 인근수영장 등에서 개최하여 능력개발 훈련과 각종 놀이를 가르쳐 주었다. 또한 적자로 폐업 상태에 있던 광천 삼화신용협동조합을 인수받았다. 그리고 어린이들에게 빈 병을 모아오게 해 출자금 통장을 발행하여 성인조합원까지 확대하여 신협을 정상화시켰다. 그는 지역 활동을 주민들에게 인정받아 처음에는 A동 반장을 맡았지만 나중에는 광천동 11통 합동반상회에서 새마을 지도자로 선출됐다.
1978년 전남협동개발단이 해체되자 그는 YWCA신용협동조합에 다니게 되었다. 전남협동개발단이 해체되었지만 그는 광천동시민아파트 지역개발운동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 운동은 그가 평생 동안 추진하려고 했던 사업이기 때문이었다.
1978년 7월, 시민아파트 옆 광천동 성당 교리 실에 들불야학이 생겨서 학생을 모집하였다. 그가 기획한 종합개발 계획서 안에 야간중학교 건립이 있었는데 뜻밖의 기회가 생긴 것이다. 마침 고교 동창인 김상윤 씨의 소개로 들불야학의 강학(교사)들을 만나게 되었다. 이들은 선생님이 아니라 강의하고 배운다는 뜻으로 강학이라 불렀다. 강학들은 주로 서울에서 학생운동 하다 휴학하고 내려온 학생들과 전남대학교 재학생들이었다. 나중에 공장에 다니던 윤상원이 야학 강학으로 합류를 하였다. 김영철과 윤상원은 그렇게 만났다.

5월 항쟁 참여, 그리고 정신이상
1980년 5월 18일, 비상계엄확대와 공수부대의 광주 투입으로 시민학생에 대한 학살 만행이 자행되었다. 18일, 그는 교회 예배를 마치고 시내로 나가 태평극장 앞 시위대에 합류하여 법원과 농장다리까지 진출하였다. 이윽고 도청 방면에서 공수대원들이 투입되자 위험을 느껴 귀가를 하였다. 19일은 신협에 정상출근을 하였다. 오전 10시 경, 공수대원들이 신협으로 들어와 직원인 박용준의 소지품을 검사한 후 2층 양서조합의 직원 황일봉을 끌어내었다. 이 광경을 보고 옆 건물 무등고시학원 청년들이 큰소리로 제지를 하자 공수대원들은 학원생들을 잡아 무자비하게 구타하였다. 공수대원들은 계속해서 금남로의 다방이나 가게를 뒤지며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년들을 끌어내어 구타를 하였다. 그는 공수대원의 만행을 직접 목격하고서 치를 떨어야 했다. 19일 저녁, 그는 들불야학팀과 함께 공수부대의 잔학상과 이에 대항하는 시민들의 투쟁 소식을 알리기 위해 유인물을 제작하였다. 20일은 가톨릭센타 앞에서 시위에 참여하였다. 그때 계엄군이 던진 돌에 왼쪽 어깨를 맞아 좌수족 불구의 원인이 되었다. 21일 계엄군이 광주시 일원에서 철수하자, 22일부터 광주 YWCA를 중심으로 도청과 녹두서점을 오가며 윤상원, 박효선 등과 협의하여 투사회보 및 궐기대회 등을 추진하였다. 또한 광주YWCA간사였던 정유아, 이행자, 녹두서점 김상윤의 부인인 정현애 등과 함께 검은 리본을 만들어 시민학생의 가슴에 달아 주기도하고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합동장례식을 치르는 비용으로 사용하였다.
25일, 도청의 시민학생수습위원회가 시민학생투쟁위원회로조직이 재편되었다. 투항과 수습을 전제로 한 온건적 지도부가 투쟁을 전제로 한 강경적 지도부로 조직이 재편된 것이다. 이는 윤상원, 김영철, 김종배, 정상용, 이양현, 정해직 등이 기동타격대를 장악하고 있던 박남선의 지원을 받아 취한 조치였다. 새로 조직된 시민학생투쟁위원회에서 김영철은 기획실장을 맡았다.
5월 27일 새벽, 중화기로무장한 계엄군은 장갑차를 앞세우고 도청으로 진입하였다. 시민군과 투쟁위원들은 총과 탄환을 보급 받고 도청과 시내 일원에 배치되었다. 그는 들불야학의 동지이자 투쟁위원회 대변인을 맡고 있던 윤상원과 기획위원을 맡고 있던 이양현과 함께 도청 2층 회의실에서 창밖을 향해 경계를 섰다. 계엄군이 현관과 창문 앞에서 사과탄을 던지며 총을 쏘아대는 순간 뒷창문에서 총소리가 들리더니 옆에 있던 윤상원이 쓰러졌다. 그는 윤상원을 바닥에 눕히고 벽으로 몸을 숨겼지만 결국 이양현과 함께 계엄군에게 체포되었다.
그가 끌려간 곳은 상무대 영창이었다. 도청과 시내 곳곳에서 싸우던 동지들이 속속 연행되어 왔다. 그는 그곳에서 계엄군의 총격에 죽고 말았다는 박용준의 소식도 듣게 되었다. 계엄수사관들은 그를 마치 밀파된 간첩처럼 윽박질렀다. 그는 형제와도 같은 윤상원과 박용준의 죽음과 수사당국의 고문을 생각하여 자살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는 먼저 왼손 동맥을 끊으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자 화장실 콘크리트 모서리 벽에 이마를 세 번 부딪쳤다. 계엄군은 쓰러진 그를 병원에 옮겨 겉 상처만 봉합하고 말았다.
갇힌 지 2개월이 지난 80년 8월경부터 김영철의 말투나 행동에서 정신이상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동료들은 정신과의 정밀진단을 요구하였지만 계엄수사당국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정신이상 증세는 더욱 심해졌으나 정상적인 치료를 한 번도 받지 못했다. 1981년 12월, 김영철은 성탄절 특사로 석방되었지만 예전의 건강한 모습을 잃은 지 이미 오래였다.

소천
김영철이 석방된 후, 부인 김순자 씨는 전남대 병원, 전주 예수병원 등 백방으로 찾아다니며 남편의 치료를 하였다. 하지만 병세는 조금도 호전되지 않았다. 1984년, 결국 치료는 포기되고 나주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 그리고 1998년 영면하기까지 16여 년 동안 국림나주정신병원과 몇 군데의 정신병원을 전전하였다.
1998년 1월, 나주병원으로부터 그의 건강상태가 급격하게 악화되었다는 전갈이 왔다. 16여년 치료 도중 생긴 여러 합병증과 왼쪽 신체마비 현상으로 제대로 걸음을 걷지 못해 넘어지거나 미끄러져서 생긴 신체외상 등으로 그는 쇠약해져 있었다. 그는 불치병 감염 여부 등의 검진을 위한 3개월 여의 종합 진료를 받았다. 송백회 회원등 그를 아끼는 여러 분들이 성금을 모아 취한 조치였다. 그리고 간병 체제가 잘 되어 있다는 영광의 정신병원에 입원을 하였다. 하지만 그는 이미 회복되기 힘든 상태였다.
영광의 병원에 입원한 지 4개월이 지난 1998년 7월 21일, 간식을 먹던 도중 기도가 막혀 호흡이 멈춘 사고가 발생했다. 그는 급히 조선대병원으로 옮겼으나 의사는 회생불가라는 판정을 내렸다. 가족의 상의 끝에 1998년 8월 5일,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인 동명이, 두 딸 선영과 은형이 있는 광주 신안동 자택으로 옮겨왔다. 그는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했지만 그의 의식은 열흘쯤 더 남아 있었다.
그리고 8월 16일 오후 3시 45분, 그의 영혼은 고단한 신체를 떠났다. 청년이 되기까지 호강 한 번 해 보지 못한 채 부림만 당하다 2년여의 감옥생활, 16여년의 정신병원 수용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때 그의 나이 51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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