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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효선 ]
제목 증언과 실천으로서의 연극-박영정- mail 등록일 2010-10-29
작성자 김연옥 조회수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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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과 실천으로서의 연극 -박효선론

박영정(연극평론가)

 

 광주민중항쟁과 박효선

  고 박효선의 작품세계를 광주민중항쟁을 떠나서 언급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가 남긴 작품의 대부분이 광주민중항쟁과 직ㆍ간접의 관계를 갖고 있고, 또 그 자신이 1980년 5월 당시 광주항쟁도청 지도부의 일원이었던 사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이제 박효선 하면 <금희의 오월>이나 <모란꽃> 등이 바로 연상될 만큼 그가 세상에 알려지게 한 작품도 모두 광주민중항쟁을 소재로 한 것들이다.  그것은 항쟁에 함께 했다 살아남은 자가 지닌 ‘숙명적인 책무’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박효선 하면 으레 광주나 ‘5ㆍ18’을 연상하는 것은, 작가로서의 그가 지닌 가치의 전모를 어느 특정 부분에 고착시켜 이해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박효선에게서 5ㆍ18을 뺀다면 무엇이 남을까 곰곰 생각해 보았다.  만일 우리 역사에서 5ㆍ18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는 어떠한 삶의 경력을 갖게 되었을까?  물론 어떤 상황에서도 그는 연극을 계속하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의 삶의 역정을 보다 찬찬히 들여다보게 되면, 그는 살아남은 자의 책무를 다름 아닌 ‘연극’을 통해 묵묵히 실천해 왔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는 전남대학 연극반 시절 이후 한시도 연극 무대를 떠나본 적이 없다.  대학 졸업 후 일시 교편을 잡았던 적이 있었지만, 그것마저 잠시였고, 그 순간에도 그는 연극을 떠나 있지는 않았다.  정치적 대결이 극단화되었던  1980년대에도 그는 정치적 투쟁이 아닌 ‘연극’을 통해 발언하고, 또 투쟁하였다.  그의 삶의 화두가 바로 연극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연극인으로서 박효선의 작품 세계의 전모를 말하는 것이 그에 대한 극히 온당한 접근법일뿐더러, 또 그렇게 함으로써 5ㆍ18과 박효선의 관계도 피상적으로 보지 않게 해 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 짧은 글을 통해 그가 남긴 여러 작품을 전부 언급한 다는 것은 다소 부적절하다고 생각되기에, 또 내 입장에서는 아직도 여전히 그를 지나간 연극사 속의 극작가처럼 객관적으로 정리할 만한 정신적 여유랄까 심리적 거리가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의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몇 작품을 통해 그의 작품 세계의 큰 흐름을 지며보던 한 후배의 입장에서 이 글을 쓰고자 한다.  적어도 내 입장에서는 그에 대한 본격적, 객관적 접근은 좀 더 시간을 기다려야 가능한 일이 아닐까 한다.


 <함평 고구마>에서 <돼지풀이>까지


  내가 박효선을 처음 만난 것은 1983년 광주의 소극장ㆍ문화기획 ‘일과놀이’에서이다.  그 때 나는 소극장 ‘일과놀이’의 잡무를 맡고 있던 ‘잡인’(?)이었고, 그는 그 한 부서인 극단 ‘일과놀이’의 활동을 이끌고 있었다.  극단 ‘일과놀이’의 제 2회 공연 <여우와 포도>(1983년 가을)의 연출을 박효선이 맡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일과놀이’는 당시 광주지역에서 문화운동센터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고, 그 이전의 극회 ‘광대’가 하던 마당굿 운동을 좀 더 확대하여 문학ㆍ미술ㆍ연극 등 여러 장르의 창작 활동과 시민미술학교ㆍ농촌 두레활동 등 대중에 대한 문화 예술 교육, 그리고 민중적 출판 활동 등의 사업을 진행하던 곳이다.)

  그러나 사실 내가 박효선을 본 것은 훨씬 이전부터이다.  나는 우연이 그와 또 다른 선배들이 함께 했던 1978년의 <함평 고구마>공연을 본 적이 있다.  또한 나는 ‘예비강학’으로 일시적 인연을 맺은 바 있는 광천동 들불야학에서 졸업생들의 졸업기념 연극(1979년)을 본적이 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두 공연에 모두 박효선이 관여했다고 한다.  앞 공연은 그가 대본 작업을 했고, 뒤의 야학 학생들의 공연은 연출까지 맡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함평고구마운동은 물론 이려니와 들불야학도 1970년대 말 광주지역에서는 가장 민중적이고 또 가장 진보적인 투쟁의 공간이었다.  거기에 그는 연극이라는 매체를 가지고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실천형태는 그의 평생 동안의 연극 활동에 그대로 유지되면서 그 방법적 발전과 세련이 추구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1980년 봄 광주지역에서도 비로소 ‘문화운동’의 깃발을 들고 극회 ‘광대’가 창립되었다.  박효선 형이 그 대열에 함께 하였음은 물론이다.  그보다는 그를 비롯한 몇 사람이 앞서 말한 대로 <함평고구마>나 야학공연 등을 했기에 ‘광대’가 출범할 수 있었고, 또 출범 이후 광주 운동권이나 대중들로부터 절대적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1980년 3월 15일 광주 YMCA무진관에서 있었던 창립 공연 마당굿 <돼지풀이>가 관중들의 성원 속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가능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함평 고구마>는 매우 짧은 단편이다.  등장인물도 ‘고구마’와 이름 없는 ‘농부들’이다.  그 고구마란 도대체 누구이며,  또 농부들은 구체적으로 누구인가?  그들은 전라남도 함평의 농민들이며, 또 그곳에서 산출되는 고구마이다.  1978년 함평농민들의 고구마 피해 보상 싸움의 성공 사례를 극화한 것이 바로 <함평 고구마>이다.  함평 피해 농민을 상징하는 ‘고구마’가 등장하여 아무 것도 모르는 관객으로서의 ‘농부들’에게 ‘고구마사건’을 서사적으로 소개하는 방식으로 출발한 이 작품은, 중반에 ‘○○○가 ⏐⏐⏐차대끼’와 ⏐⏐⏐가○○○받대끼‘ 놀이를 통해

극적 반전이 일어나고, 그를 통해 결말부에서는 고구마와 농민들(농부1, 2, 3, 4, 5)이 한 덩어리가 되어 집단적 신명을 불러일으키는 구성을 위하고 있다.

  즉, 도입부에서는 서사적 인식 구조로 출발하여 결말부에서는 마당굿적 집단적 신명풀이로 옮겨가는 독특한 구조를 취하고 있는 것이 <함평 고구마>이다.  당시 이 작품을 쓰는 데 주도하였던 박효선 형이 그러한 극적 구조를 인식하지는 못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짧은 시간 안에 아마추어 수준의 배우들(당시 전남대 학생들이었음)을 통해 고구마 사건의 전모를  담은 극을 만들고자 하다가 우연히 만들어진 극 형식일수도 있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사실주의 무대극을 연극적 전통으로 배워 왔던 그에게 있어서 <함평 고구마>공연은, 비록 자신이 만든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연극 관에 커다란 변화를 준 체험이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때까지 막연하게 인식되던 ‘마당극’이라는 양식의 효능(?)을 직접 체험했다고 할까?

  이러한 체험이 광대의 <돼지풀이> 창작으로 발전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런 귀결이다.  앞서 <함평 고구마>가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한 사례 극이었다면, <돼지풀이>는 당시 사회 문제가 되어 있던 ‘돼지값 파동’을 소재로 하되, 거기에 돼지 사육 농민들의 투쟁을 가상으로 그려 넣어 만든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의 농민투쟁 부분은 앞서 <함평 고구마>에서 가져 온 것이라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박효선을 비롯한 광주지역 선배들이 참여하여 공동창작과 공동연출로 만들어진 이 공연에서는 돼지값 파동이 발생하게 된 구조적 원인을 극적 구조로 보여 준다.  당국자, 농협 직원, 국장, 차관, 장관을 비롯한 중간상인들까지 마당 판에 등장시켜 농산물 가격의 왜곡 과정을 직접 형상화하고 있다.  또 농민들이 피해보상운동을 전개하다 당국의 탄압으로 좌절하고 마는 행위를 모두 장면화 하여 보여주고 있다.  농민들의 투쟁이 실패로 끝나는 것은 앞서 <함평 고구마>와는 정반대되는 결말이다.  따라서 뒤풀이 장면은 ‘돈철에미’의 흐느낌에서 출발한다.  그렇지만 ‘쾌지나 칭칭나네“를 부르는 과정에서 점차 힘을 얻어 마침내 집단적 신명으로 옮겨가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이 <돼지풀이>에서 특징적인 것은 앞풀이 장면이다.  죽은 돼지 혼백의 위령제로 설정된 이 장면에서 무당이 등장하여 ‘돈신(豚神)’에게 억울하게 죽어간 돼지 혼백의 내력이라도 밝혀 달라는 청원을 하게 된다.  전체 공연이 그 돼지들의 혼백을 위로하기 위한 굿판으로 설정되는 셈이다.  “삼백만두 대한민국 돼지들을 대표하여, 육십만 두 전라도 돼지들을 대표하여, 특히 죄 없이 비명에 간 백만 돼지들의 혼령을 대표하여, 특히 죄 없이 비명에 간 백만 돼지들의 혼령을 대표하여 여기 한 많고 원 많은 돼지의 … 맺힌 한 풀어주소 —” 하는 무당의 사설은 마치 바로 두 달 뒤에 일어났던  5ㆍ18의 상황을 예견한 듯 한 느낌을 준다.  어쨌든  이러한 앞풀이의 극적 기능은 극의 내용과 결말을 관객에게 미리 알려 줌으로써 집단적 신명에 의한 향유극(享有劇)으로서의 마당굿의 특성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극중 상황에 따라 관중들은 분노도 하고 슬퍼도 하며, 항의도 하고, 웃고 떠들며 즐기기도 하게 되는 것이다.  원형 마당 판이 지닌 극적 기능을 효과적으로 살린 동선이나, 수입돼지와 토종돼지의 대결 장면을 탈과 춤으로 표현한 부분 등은 그 기법적 측면에서도 특별한 주목을 받았다.  <돼지풀이>는 박효선 형으로서는 첫 공식 무대였다고 할 수 있으며, 전남대 연극반 시절 닦았던 리얼리즘 무대극의 연극 체험에 마당굿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연극 체험을 더하여 ‘박효선 연극’의 기본형을 형성해 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극회 ‘광대’는 다음 작품으로 황석영의 <한씨 연대기> 각색 공연을 준비 중이었는데, 광주에서 민중항쟁이 발발함에 따라 활동이 일시 중지된다.  대신 ‘광대’구성원들은 거의 대부분이 항쟁 과정에 적극 참여하게 되고, 이 때 박효선도 도청 지도부의 홍보부장을 맡아서 시민궐기대회 등 문화 부문의 활동을 하게 된다.  이 때 투사회보 제작 등 문화적 투쟁에 ‘광대’와 ‘들불야학’멤버들의 활동에 대해서는 별도의 얘기가 필요할 것이다.  항쟁이 끝난 후 박효선 형은 20개월의 긴 ‘잠행’을 하게 된다.


  <잠행>에서 <금희의 오월>까지

  1984년 2월 그는 전남대 연극반 출신 선후배를 결집하여 극단 ‘토박이’를 만들었고, <세일즈맨의 죽음>이니 <하이파에 돌아와서>니 <산국>이니 하는 사회성 짙은 기성 작품들을 공연하였다.  나는 그 무렵의 극단 ‘토박이’와는 직접 관계를 갖고 있지 않았으나 그 해 12월 창립한 ‘광주민중문화연구회’의 활동을 통해 박효선 형과 만나게 되었고, 어엿한 ‘조직적 관계’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나와 그의 만남은 거의 일상의 한 부분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무렵 그는 광주에서 발행된 무크지 ⌜민족현실과 지역운동⌟(1985)에 희곡 <잠행>을 발표하게 된다.  이 희곡은 그가 본격적 극작가로서 출발하는 계기에 해당한다.  이 희곡은  5ㆍ18이후 수배 생활을 하던 어느 운동가의 이야기이다.  비록 감옥 밖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서 살아야 하는 수배자들의 생활은 스스로 자신들의 시선을 피해서 살아야 하는 수배자들의 생활은 스스로 자신들의 통제하는 또 다른 감옥이었던 셈이다.  이처럼 바깥과 차단된 밀폐된 공간에서도 의식의 투명함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두 명의 투사(이면서 동시에 인간임)를 그리고 있는 것이 곧 <잠행>이다.  자전적 내용을 담고 있는 이 희곡을 통해 1980년 5월 이후 오랜 동안 안으로만 숙어들던 그의 작가 의식이 비로소 고개를 들고 나설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의 잠행은  5ㆍ18직후에 있었지만, 살아남은 자로서의 상처(부끄러움과 소명의식) 때문에 정신적으로 오랜 ‘잠행’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며, 이 작품의 탈고를 매개로 비로소 ‘잠행’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마련되었던 셈이다.  극단 ‘토박이’의 초기 공연 작품들에 그의 창작품이 없는 것은 그러한 사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희곡이 무대화된 것은 1992년의 일로,  <그들은 잠수함을 탔다>로 제목이 바뀌어 공연되었다.

  1986년의 <그리운 아메리카>탈고를 거쳐 1987년 <어머니>를 가지고 자작 연출을 함으로써 그의 창작 활동은 본격적으로 기지개를 켜게 된다.  그리고 1988년 봄 제 1회 민족극한마당(서울 미리내 소극장)에 역작<금희의 오월>(박효선 작/연출)을 선보이면서 자신의 연극적 역량을 한껏 발휘하게 된다.

  <금희의 오월>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고, 또 여기저기서 많이 언급되었으므로 자세한 언급은 피하고자 한다.  한 가지 내 입장에서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처음 <함평 고구마>나 <돼지풀이>등 마당굿 운동으로 시작되었던 그의 연극 활동이 초기 ‘토박이’시절에는 서구적 무대극으로 일관되었던 데서 오는 내적 불편함(당시의 민족극 운동에서는 마당굿 양식이 주도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오는)으로 웅크리고 있다가, 이 <금희의 오월>의 성공으로 일시에 해소가 되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1988년 12월 전국민족극운동협의회 출범 당시 ‘민족극’이라는 새로운 실천 개념을 세우고 그 안에 마당극이나 무대극을 모두 아우르는 인식 지평의 확대가 가능하게 하는데 <금희의 오월>의 성공이 상당부분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금희의 오월>이후 박효선은 매우 왕성한 창작력을 보여 준다.

1989년에 극단 ‘토박이’직영의 ‘민들레 소극장’을 개관한 것도 큰 받침이 되었고, 1987년 이후 확장된 노동자 문화 활동 공간도 그의  활동에 활력을 주었다.  그 이후 <딸들아 일어나라>등 노동자의 삶을 소재로 한 극들도 여러 편 쓰게 된다.  그가 직접 노동운도에 투신한 것은 아니지만 들불야학에서 그랬던 것처럼 연극적 실천을 통해 언제나 노동자들과 함께 했다고 할 수 있다.


 <모란꽃>과 그 이후


  1993년 발표된 <모란꽃>은 그의  5ㆍ18관계 연극 가운데 새로운 기원을 여는 작품이다.  심리극의 형식을 빌려  5ㆍ18당시 시민군의 가두방송 조였던 한 여인이 겪어야 했던 육체적 ㆍ심리적 상처를 적나라하게 표출시킴으로써 그 여인을 비롯한 상처받은 광주시민, 나아가 한국민중을 치유하고자 한 작품이 <모란꽃>이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단지 1980년 5월의 진실을 알리고자 할 뿐 아니라, 1990년대의 시점에서 5.18에 대한 재인식을 동시에 성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1990년대의 정권에 의해 이루어진 5.18 관련 일련의 조치들이 ‘광주’를 또 한번 죽이는 결과에 이른 것에 대한 그의 연극적 대응이었다고 할까.  이어지는 <청실홍실> (1997)도 바로 <모란꽃>의 맥을 잇는 작품이다.

  이렇듯 5.18 관련 작품들을 통해 박효선의 연극 세계는 가장 찬란한 빛을 발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증언과 기록으로서의 연극, 저항과 실천으로서의 연극. 그가 지켜온 작품의 세계는 분명 광주민중항쟁의 연장선에 놓여 있고, 또 항쟁의 연극적 실천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유독 5.18 관련 작품의 창작에 몰두하게 된 것은 1980년 5월 이후 함께 하던 동지들을 가슴에묻고 살아온 그에게는 일종의 숙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숙명이 <금희의 오월> 이후 5.18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다 싶었던 그를 다시 되돌이킨 것은 1990년대의 아이러니한 상황 때문이 아닌가 싶다.  5.18이 ‘역사화’되고, 또 ‘광주 지역’의 문제로 밀려나게 된 1990년대의 상황이 역설적으로 그를 여전히 광주에 묶어 두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나 싶다. 

1998년 5월 비디오영화 <레드 브릭>을 쓰고 감독하는 등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광주에서 5월을 노래하고 있었다.

  이처럼 그가 온 신명을 다해 5월을 노래하는 동안 이젠 그마저 5월 동지들 곁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20년 만에 비로소 그는 옛 동지들과의 만남을 통해 마음 밑바닥으로부터 안식을 얻었을 것이라고 위안을 해 보지만, 그가 없는 ‘빈 터’의 쓸쓸함을 지울 길이 없다.  그쪽 세상에서나마 그의 영혼이 진정 자유롭게 날개짓 할 수 있기를 마을 모아 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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