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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용준 ]
제목 박용준의 일기-5.18기념재단자료 mail 등록일 2010-11-08
작성자 김연옥 조회수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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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준의 일기>

1980. 5. 21밤

간간이 들리는 총소리는 밤의 정적을 깨고 있다.

악몽의 몇일

노는게 그립다. 긴긴 진리의 캠퍼스

즐겁던 학우들

소총소리

불안.1 불안은 차라리 말하다.

걱정 이렇게 표현하는게 더 좋을것 같구나.

오늘 오후 그들은 드디어 우리를 향해 사격을 가했다.

쓰러지는 몇몇 우리의 학우요 시민들

품에 번지는 피!

모든걸 확실히 했다. 죽음.

판단 캠퍼스의 잔디위에 내려 쪼이는 따스한 햇볕

우리의 피를 원한다면

이 조그마한 한몸의 희생으로 자유(악몽의 몇일, 이런게 지옥이란

걸 느낀다)라는 댓가를 얻을 수 있다면

희생하겠다.

헬기소리, 또 총소리

싸우다 쓰러져간 우리 학우 그리고 광주시민

나도 부끄럽지 않게 일어서리라.


    ■ 박용준                                                              

  생  애 : 1956. 7. 9  - 1980. 5. 27
  직  업 : YWCA신협 근무
  사망장소 :  YWCA회관
  사망원인 : 얼굴관통 총상.
  묘지번호 : 2-38

  ■ 증언록                                                                          

증언자: 나명관(들불야학 제자) 1999. 1.

                  빈민구제 앞장선 들불야학 강학

영아원과 고아원에서 자란 박용준은 YWCA신협에 근무하면서 청년회 활동, 특히 천대받는 이들을 위한 빈민운동에 앞장섰다. 들불야학에 강학으로 나가고 있었으며 5.18때는 주로 투사회보 등의 유인물 작성하는 일을 했다. 27일 YWCA를 방어하다가 얼굴에 총을 맞고 희생됐다.


들불야학 시절


나는 78년도에 설립된 광천동 들불야학 1기 졸업생인데 형은 79년도에 제3기 강학으로 들어오신 걸로 기억한다. 특강을 맡아서 가르치신 것 같은데, 나는 직접 배우지는 않았다. 80년 2월에 졸업여행을 갔다 왔으니까 형을 만난 것은 기간으로 하면 얼마되지도 않고 어렸을 적이라 가정환경은 아는바가 없다.

들려오는 이야기로는, 1957년 정월 어디에선가 태어나서 학동 영신영아원에서 유아시절을 보내고, 무등육아원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숭의실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YWCA신협 준사원으로 취직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형이 김영철씨를 만나고부터 남은 인생과 없음을 소외받고 착취당하는 이웃을 위해 바치겠다고 주민빈민운동에 뛰어 들었다는 말을 들었다. 형이 고아로 자라면서 겪었던 좌절과 슬픔들이 빈민속에서도 잘 융화되어 아주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야학에 와서도 마찬가지셨다. 다른 강학과는 의견 차이가 많아 싸움도 여러번 하고 곧잘 논쟁으로 이어졌지만 형은 우리와 거의 마찰이 없었다. 말도 거의 없고 그저 좋은 형님, 행복한 미소를 띄우는 듬직한 형으로 우리를 지켜주었다. 내가 다니던 들불야학이 처음엔 6개월을 한 학기로 나누어 학과수업을 하는 검정고시 야학이었다. 그러다가 학생 대부분이 광천동 공단에 다니는 공원(노동자)들이라 별로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직접 교재를 만들어 우리에게 필요한 기본적인 생활지식이나 주변지식을 익혀나가는 생활야학으로 자리를 잡았다.

거기에서 처음으로 우리나라와 미국의 관계라든지 착취당하고 있는 노동자와 노동현실 그리고 노동법등을 접했다. 그당시 너무도 생소한 노동운동이었던 것 같다. 그때 대학에 다니던 선생님들이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우리들을 모아서 열악한 환경속에 있음을 깨우쳐 주고 자기의 권익을 위해 싸울수 있는 준비를 해주셨다.


5.18이 시작되고


18일 투쟁이 시작되면서 우리가 다시 일을 시작했다. 야학때 책을 만들어 썼던 그 등사기로 투사회보의 전신인 유인물을 만들었다. 광천동과 시내 변두리에 공수부대의 잔학성을 알리는 일을 시작했다. 형은 필경에도 소질이 있어서 조사해온 것과 도청 집행부가 정리한 것을 종합해 주면 우리가 등사했던 것이다.

23~4일엔 YWCA로 자리를 옮겨 극단 광대팀과 합류해서 함께 일했다. 계엄군이 들어올 때까지 쭉 같이 생활했다. 형은 소위 강경파 선배님이신 고 김영철, 윤상원, 이한열 등의 집행부와의 연결고리로 중요한 일을 하면서도 조금씩 시간을 내 우리 일을 많이 도와주셨다. 말은 없었어도 주체가 되어 앞서지 어떤 일이든 뒤처지지 않아서 우리들과도 더욱 자연스럽게 섞였다.

25일엔 시민궐기대회때 사회인 대표로 발표자로 나서기도 했다. 키도 작고 체구가 아주 작은데 어디에서 그런 큰 열정이 나오는지 참 의아스러웠다.

26일엔 개인적으로 친형 같고, 우리는 목숨걸고 싸우는 것이 정립도 안된터라 형에게 피하라고 했더니 도리어 우리를 걱정하는 것이다. 그날밤에는 우리들도 투사회보 제작을 중단하고, 총을 들고 싸워야 한다고 결의, 미처 못돌린 투사회보를 보듬고 울었다. 계엄군의 진압소직을 알던터라 최후의 만찬을 했다. 도청으로 총기를 지급 받으러 가면서 계엄군과 목숨건 싸움을 앞둔 형에게서 또다른 인간적인 면을 보기도 했다. 형은 예정된 죽음으로 앞두고 너무 가냘픈 존재라고 너무 비참한 생활을 하는 자라고 하면서도 다른 고통받는 이들을 유해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것으로 마지막 헤어지고 나는 상무대로 잡혀가서야 형의 사망소식을 듣게 되었다. 형은 말없이 우리 곁에 계셨다가 조용히 우리 곁을 떠나셨다.

우리 곁에 있을때는 별 말이 없었지만 밖에서는 열심히 일하셨던 것 같다. 죽음을 앞두고 한점 부끄럼 없는 삶을 위해 노력하신 것 같다.

새로 조성된 5・18묘역에 형의 묘비문에는 ‘시대의 어두음을 온몸으로 맞서시다가 숭고히 떠나가신 스물다섯의 외로운 님의 생애, 살아남은 자의 가슴속에 영원히 기억되오리라…’라고 적혀있다.


희생된 이후


지난 88년부터 대부분의 5・18관련 사망자와 부상자들이 정부로부터 보상금을 받았지만 박용준은 예외였다. 가족들이 없어 보상근거가 없다는게 그 이유였다. 9년여 동안 보상금 지급을 미뤄오던 정부는 결국 지난해(96년) 8월에 1억2천2백79만8천5백50원을 광주 YWCA에 내놓았다.

광주 YWCA는 이 돈으로 「박용준 장학회」를 설립하여 불우한 환경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청소년들을 위해 쓸 계획 한가지와, 문화회관을 건립하여 「박용준 열사방」을 따로 마련, 유품을 보관할 계획 한가지를 가지고 있다.

                                                                             <5.18  기념재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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