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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윤상원열사는 아직도 살아있다. -무등일보- mail 등록일 2010-11-08
작성자 김연옥 조회수 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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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5월을 위해 태어난 인물』이라고 평하고 있는 그가 만난 선후배들의 「믿음」이다. 그만큼 윤상원씨는 그해 5월에 철저히 싸웠고 처참하게 죽어 「5월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뿐만 아니라 31세의 청년으로 죽기까지 그의 삶은 여러운동 부문에 커다란 족적을 남겨 10년이 지난 오늘날 「부활하는 윤상원」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의 삶은 영화로, 연극으로, 전기로, 노래로, 문학상 등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서울 「새빛 영화사」는 그의 삶과 일대기를 담은 영화 「부활의 노래」를 곧 선보일 예정이며 그의 전기가 풀빛출판사에서 9월쯤 출판된다.

또 노동자신문은 「80년대 노동해방 투쟁의 불길을 당긴 5월의 새벽별 윤상원」을 기리며 「윤상원 문학상」을 제정, 지난 5월 1일 당선작을 발표했다.

전남사회문제연구소도 올해 「윤상원상」을 만들어 사회운동부문과 학술부문에 2개의 상을 수상할 예정이다. 그는 전남대시절 학생운동과 연극반활동을 했으며 졸업후 광천동 들불야학을 중심으로 노동운동에 몸담은 시기에 투철한 운동적 삶을 일관해 많은 선후배와 친구들의 존경과 흠모를 받았다. 어쩌면 그의 유족은 가족뿐 아니라 이들 모두가 유족인 셈이며 그를 아는 사람들의 가슴에 커다란 못이 돼 아직도 풀리지를 않고 있다. 3남 4녀중 장남을 잃은 윤석동(64) 김인숙(60)부부는 해마다 5월이 되면 농사일손이 잡히지 않고 시름만 깊어간다.

윤씨의 학비를 대느라 4마지기 논을 팔아 이제는 남은 전답까지 소작하고 있지만 홧병을 얻어 고혈압이 된 윤석동씨 약값조달도 어려운 형편이다. 최근 억지로 받은 보상금 3천만원도 빚을 갚고 운동단체에 얼마 주고 나니 여전히 5백만원의 빚이 남았다. 윤씨부부는 죽어서라도 맏아들의 총각신세를 면해주기 위해 들불야학을 같이 했던 박기순씨(전남대국사교육과 3년 강제 휴학돼 노동운동을 하다 과로로 숨짐)와 82년 영혼결혼식을 올려주기도 했다. 이제는 장남을 빼어 닮은 셋째아들 태원씨(31.올해 조선대 사학과 졸업)를 죽은 형 대신 장가를 보냈으니 취직을 해 잘살아 주길 바랄 뿐이라며 기대를 걸었다. 윤상원씨는 80년 5월 항쟁 당시 등불야학팀을 이끌고 「투사회보」를 제작하다 도청으로 들어가 강경파로 알려진 시민투쟁위원회를 조직해 대변인을 맡아 끝까지 항전하다 27일 새벽 4시께 계엄군의 총을 맞고 숨을 거뒀다.

27일 아침 그의 시신을 최초로 목격한 기자의 증언은 이렇다. 아침 6시 반께 도청회의실에 옷과 머리가 불에 그을리고 손을 오그린 채 등에 총상을 입고 오른쪽 옆구리에서 창자가 터져 나온 시신이 있었다. 겉옷을 벗겨보니 「10번 대변인」이란 명찰이 나왔고 그제야 기자는 26일 도청에서 자기가 몸을 피신하라고 일렀던 그 사람임을 확인했다. 기자는 번뜻 26일 『내일 계엄군이 쳐들어와도 싸우다 죽겠으며 우리의 죽음은 항쟁의 참뜻을 후세 역사화의 밑거름이 되게 할 것』이라는 그와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으며 27일 마지막 순간에 스스로 기름을 끼얹고 분신도중 계엄군의 총을 맞았음을 추측할 수 있었다.

윤상원씨의 죽음은 그의 동료와 선후배 누구에게나 쓰라린 상처를 남겼지만 특히 자신이 따랐던 김상윤씨(43 80년 5ㆍ18과 관련 구속)에게는 아직도 돌이켜지지 않는 엄청난 충격과 상흔을 심어주었다. 윤씨가 항상 형님으로 여기고 그의 사상과 운동노선의 중심에 간직했던 김상윤씨는 『아직도 상원이나 5월 얘기는 말문이 터지지 않고 가슴이 꽉꽉 가위눌려 있으며 전혀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ㆍㆍㆍ」 5월의 총체적 상징 고윤상원씨의 10주기인 27일 망월동 윤씨 묘역엔 올해도 어김없이 그를 가슴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많은 「동지」들이 모여 그의 영혼 결혼식때 만들어진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부활하는 윤상원」을 만날 것이다.
                                                                   <무등일보 1990/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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