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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영일 ]
제목 광주일고동창회카페에서 펌- 전용호님의 신영일 20주기추모시와댓글 mail 등록일 2010-11-09
작성자 김연옥 조회수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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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일 20주기에 부쳐
* 영일이가 죽은지 20년이 되었다. 영일이 20주기 추모식에 낭독했던 편지글을 올린다.

20년만에 보내는 편지/전용호

친구. 오랜만일세. 하늘나라에서 잘 지내시는가.
친구, 자네가 우리 곁을 떠난 지 어언 스무해가 지났구려.
친구, 자네를 생각하면 헤아릴 수도 없는 수많은 기억의 영상들이 뇌리를 훑으며 지나간다네.

고등학교 1학년 교실에서 자네를 처음 만났을 때, 그리고 3년 동안 공교롭게도 같은 반이 되어 철없는 사춘기의 방황을 함께 겪던 시절들. 통키타와 담배와 막걸리, 그리고 여학생들과의 미팅과도 같은 여러 가지 일들로 불량학생으로 불려졌던 시간들 ---, 참으로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던 시절이었지.

친구, 갈매기 조나단이라고 기억나는가?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 라는 구절을 외우고 다니면서 망나니같은 친구들과 함께 ‘조나단’이라는 모임을 만들고 커피숍을 빌려 음악회를 열고---, 그런 일에 비상한 관심을 갖던 자네가 문득 생각나네. 자네의 관심이 방황하던 사춘기에서 사회와 인간으로 변화해가던 시절의 몸부림이었다고 해야겠지.

친구, 그러다가 드디어는 역사의 격랑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지. 나는 그 어떤 날 자네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잠기기 시작했던 징후를 보았다네. 그 때는 아마 78년 봄이었을 것이네. 그것은 묘하게도 빛바랜 어떤 장면으로 기억되네. 나는 자네가 머물던 골방 머리맡에 놓여 있던 두어권의 책을 보았네. 그 책들은 자네가 저녁내내 읽다가 잠이 들면서 펼쳐놓은 상태였네. 이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와 ‘8억인과의 대화’라는 책이었네. 나는 제목도 낯설고 이해하기 힘든 두 권의 책을 보면서 이상한 감정에 빠졌다네.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나는 그 묘한 감정은 소풍날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혹은 어떤 중요한 행사를 앞두고 설레는 심정과도 흡사한 것이었네. 아니 그 느낌은 자네와 나, 그리고 동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인생이 어디론가 무작정 달려가야할 것 같은 예감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것이었다네.

그리고 자네는 그로부터 십여 년 동안을 오로지 한곳을 향하여 줄기차게 달렸지.
들불야학 교실이었던 광천동 성당과 시민아파트, 80년 민주화의 봄 시절 전남대 중앙도서관 농성장, 관현이 형과 함께 단식투쟁을 했던 광주교도소 특사 감방, 청년운동의 깃발을 올렸던 광주YWCA 5층 전청련 사무실, 거리투쟁을 주도했던 광주 가톨릭센터 앞 거리, 충장로 우체국 앞, 대통령직선쟁취투쟁을 소리높여 외쳤던 광주 YMCA 옥상과 도청앞, 민통련 호헌반대 투쟁의 대구와 인천 투쟁 현장---    

관현이 형이 즐겨쓰던 ‘사즉생, 생즉사’라는 말이 있지. 그 말처럼 자네는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으며 죽을 힘을 다해 뛰었지. 그리고 자네는 갔네, 그렇지만 자네는 결국 이겼네. 이겨서 수많은 사람들을 살렸네.

친구, 지금은 2천 8년이라네. 자네가 떠난 지 어언 20년이 흘렀지.
이십년, 자네를 만났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십년이라니---, 황당한 열정으로 대학가요제 출전한다고 기타들고 강당무대로 오르던 때가 엊그제같은데, 새벽이가 태어나 건강이 좋지 못해 인큐베이터에 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열정으로 갈지자 춤을 추면서 군중들을 선동하면서 시위에 나서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20여년이란 세월동안 자네는 서른 두살에 멈춰있고 나는 오십대에 들어섰네. 오십이라니 아직 마음은 청춘인데 옛날 어렸을 때 바라보던 늙수그레한 중늙은이와 같은 오십대 아저씨가 되었다네. 그렇지만 놀랄만한 것도 있다네. 자네가 서른 살에 멈춰있고 내가 오십대에 들어선 동안에 우리의 자녀들이 이제 자라서 청춘기를 맞아 학문을 쌓고 고민들을 하고 그러면서 자꾸 커가고 있다네.  

친구, 나는 행복하네. 지금이 무척 행복하다네. 왜냐고?
내가 혼신의 열정을 바쳐 살아왔던 젊은날의 10년이 있었기에, 또한 혼신의 열정을 바쳐 살아왔던 진정한 친구, 자네가 영원히 내 가슴에 남아있기에, 또한 자네의 뜨거운 영혼이 앞으로의 나를 충분히 지탱해나갈 것임을 확신할 수 있기에, ---

친구, 인간을 믿는가? 역사의 진보를 확신하는가? 인간과 인간의 우정을 사랑을, 연대를 믿는가?
친구, 나는 자네가 있기에 인간을 믿고 역사의 진보를 믿고 인간의 우정과 연대와 사랑을 믿는다네---  

친구, 잘 있게나
 
이름아이콘 이영목
2008-05-14 12:09
난 생전의 영일이완 잘 모르고 지냈어. 그러다 95년말 쯤 문흥지구로 이사 들어와 마음이 참으로 아리따우신 새벽이 엄마를 한 두번 만나 뵈었다네. 김태종이의 댓글이 정말 가슴에 와 닿네. 살아서나 죽어서나 부르면 애틋한 이름...그런 이름 남기고 가는 사람 드물지... 영일이의 세상 하직 이야기를 나중에 들으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느낌을 금할 수 없더군. 최근에  두 아들과 함께 잠시 얼굴을 뵈었는데, 아이들의  마음밭이 훌륭하더군.. 딸 있으면 사위 삼고 자픈 생각이 들 정도로...
   
 
이름아이콘 susupark
2008-05-14 20:02
그토록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있는 영일이도 행복할거야...
   
 
이름아이콘 임성래
2008-05-15 00:58
'화려한 휴가'를 극장에서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보고나서였네~
그때 실제 정황들을 영화 내용과 대비하여 설명을 해주려고 본 책이
'신영일을 배우자', '윤상원 평전', '만화 전두환' 등이었네~
영일이 삶을 늘 일깨워주는 용호! 고맙네~!
광주항쟁의 후유증에 지금도 육체적 정신적으로 시달리는 사람들을
용호가 일일이 찾아 기록한 르뽀집도 잘 읽어 보았네~
   
 
이름아이콘 윤경욱
2008-05-15 14:03
용호야, 영일이, 삼렬이 정말 그리운 친구들이다. 하늘나라에서 잘 지내고 있을거야.
정말 세월이 빠르구나. 너와 영일이, 네 말처럼 불량 학생으로 노낙거리다 민주화의 투사로
변해가던 너희들의 모습과 그 시대의 장면들이 기억에 생생하구나....
신영일 20주기, 5.18광주민주화운동....  아직도 웬수들은 잘 살고 있네 그려.
화해와 용서를 잘 해주는 우리나라! 참 좋은 나라네.
오메~~  미처 불것네.
   
 
이름아이콘 김영주
2008-05-16 08:45
난 영일이를 직접 만나 같은 자리에 앉아서 노닥거려 본 적은 없지만, 영일이가 고등시절 날라리 같은 모습에서 대학에서 기타치며 삐딱하게 까진 모습 그리고 학생운동에 앞장서서 깃발을 흔들거나 구호를 절규하던 모습이 4~5장면이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것 사진처럼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 2~3장엔 깜둥이 용호가 딱 붙어있어지.  난 자연스런 기회로 자연스럽게 친해지기 전에는 아무리 동창이라도 친밀하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다.  그래서 70시절과 80시절엔 그들을 먼 발치에서 바라만 보다가, 90시절부터 조금씩 가까워지다가, 용호는 최근 몇 년 사이에 가장 자주 만나는 친구 중의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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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영일이는 키가 홀쭉하니 장난끼 어린 여리고 곱닷하면서도 우울함과 반항끼 어린 큰 눈망울.  선경 스마트 빤작이밀크를 촤악 바른 듯한 학생복지로 허리를 제비족 댄스복처럼 쫘악 빼입고, 가방끈을 약간 기울여잡고  "나 이제 막 까지려고 한다?"를 보여주는 듯한 걸음걸이로, 약간 불량끼 어린 그 무슨 작업에 들어간다는 냄새가 서린 골목길을 늦가을 찬바람을 맞으며 종종 걸음으로 막 들어가는 장면이다.  바로 그 뽀짝 옆을 바지런히 뒤따라가는 작은 키에 땅땅하게 다부진 용호.  얼굴엔 그 특유의 장난끼 가득하고 약간 비릿하기도 한 눈웃음이 뭔가 그 무슨 오진 맛에 잔뜩 낄낄댄다. -- "저 자식들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작업들어가는구나!  아이 씨발 나도 따라갈까?  아서라!  걸리면 정학당할지도 모를 불장난 일꺼야, 새끼들 콱 걸려부러라!"

사진2. 전남대 77년? 6월초순 용봉축제.  그 동안 얼핏 영일이가 나팔바지에 홀쪽이 티셔츠를 쫘악 빼입고 기타 들쳐메고 지나가는 걸 두어 번 본 적이 있었다.  "저 자식, 고등때도 개다리 떨들만, 지금도 그 개다리 여전하구만!  짜식 넌 사대댕김서 꽃 속에 묻혀 산께 좋은 일 많겠지, 난 법대 댕김서 매갑는 고추밭만 헤메다가 어쩌다 미팅 한 번에 여자 비누냄새나 화장냄새에 코감대나 간질거리는데, 넌 조컷다!"  근데 이 자식이 대운동장 스타디움에서 밴드를 조직해서  김훈 '나를  두고 아리랑' "하늘과 땅 사이에~~ 꽃비가 내리더니" 김만수의 '푸른 시절'을 맴생이 콧수염을 기른 얼굴로 개다리를 후들거림서 악다구니에 가까운 '샤웃트 창법'으로 부르고 있었다.  "짜식 좆나게 까져구만!"  그 까진 모습이 너무 부러웠다.  나도 그렇게 까지고 싶었다.

근디, 사진3.  그런 싸가지 바가지로 불량학생으로 흐르던 놈이, 유신시절 그 엄혹한 독재에 핸드마이크들고 독설을 내뱉는 게 아닌가?  완전 충격이었다.  아니 어떻게 저렇게 정반대로?( 그 땐 그걸 난 정반대 현상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이런 저런 공부를 하다보니, 그건 정반대 현상이 아니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는 현상으로 해석될 수 있다. )  저 새끼 괜한 영웅심리로 설치는 거 아니야?  영일이의 그 모습이 너무나 충격이었고 너무나 의아했다.  용호도 거기에 같이 끼어들어 있었다.

사진 4. 무슨 일이 있었는가는 모르지만, 영일이는 단순한 데모꾼을 넘어서서 거듭거듭 새로운 단계로 탈각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저 소심하게 먼지 펄펄나게 초라한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에게 경외감이 조금씩 스며들어 왔다.   회색빌딩 검은 아스팔트 위로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어오는 길가에서 용호를 만났다.  얼굴에 창백한 기운이 있었다.  어디가 아픈 것 같았다.  그들의 몸과 맘 고생이 심한 것 같았다.  그해 오월의 참상을 바라만 보고 숨어버린 죄책감이 그의 모습에서 다시 살아서 다가왔다.  죄책감에 하얗게 바래버린 맘으로 "건강해라!"며 쓸쓸한 악수만 하고 헤어졌다.  80년대는 그렇게 숨어서 움츠리고 초라하고 음울한 맘이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그래서 난 그들에게 항상 미안하다.  그 뒤로 영일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도 무슨 말을 잘 못하겠다.  "영일아! 저 세상에선 무조건 즐겁고 행복해라!"

**********

세월이 그렇게 흘러, 이젠 그 무거운 맘도 많이 희미해졌다.  그제도 무슨 일로 전화로 어떤 이야기를 했는데, 용호가 어찌나 낄낄대며 웃던지 신바람이 돋아서 1분만 하려던 전화를 10분이나 노가리 풀어부렀다.  영일이 추모식에 초대장이 왔지만, 집안일이 있어서 가지 못했다.  내년엔 꼭 가야겠다.
   
 
이름아이콘 김태룡
2008-05-16 09:39
지난 4월 초에 광주 김대중센터에서 신재생에너지 전시회가 있었다.
태양광모듈 대리점 부스를 차려 장사판을 벌이고 있는 터에 깜둥이 용호가 불쑥 들어왔었다.
"야, 전주쓰레기장 위에 태양광발전소 지은 노하우 좀 알려 주라.
내가 광주쓰레기장에 똑같이 하나 지어 광주지역 시민운동 자금조달에 보태야겠다."
제안의 내용을 이리저리 살펴 본 결과
"광주 쓰레기매립장의 개스분출, 부동침하 때문에 건설불가"라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용호가 쓸쓸히 돌아갔다.

나는 부산 해양대에 진학했다가 다시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 바람에
광주에서 논 애들 소식만 바람결에 들었을 분, 살을 부대껴 본 추억은 없다.
80년 5월의 봄 민주화운동이 한창이었을 때 몇몇 시위를 주도한 건이 문제가 되어
5월 17일 경찰의 일제 예비검속에 걸려들었다.
동대문경찰서 유치장에서 1달간 갇혀 있었던 덕분에
광주5월 동지들과 심리적인 유대감이 좀 남아 있다.

졸업후에 현대그룹을 16년이나 다니며 자본주의의 첨병 노릇을 하느라
감옥으로 광야로 내몰리며 핍박받았던 친구들 고생은 피부에 와 닿지 않았었다.
대학동기들 중 빵잽이들과 민주동문회를 결성하여
그 녀석들 뒷바라지 하는 데 신경을 좀 쓰고 있었을 뿐.

전용호,김선출,김윤기,김윤창 등 운동권 친구들에게는
비겁하게 살아 온 내 과거에 대한 죄책감으로 포장된 어떤 감정이 늘 남아 있었다.
그런 차에 거기에 깜상 용호가 나타난 것이다.
놀랐다, 내심 멈칫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오랫만이네. 뭐하며 살아?" "
"응, 스토리텔러라는 걸 해. 일종의 작품활동이야."
관공서 같은 데서 발주한 프로젝트의 해설, 뒷 이야기, 설화,역사 등을 일반인이 알기 쉽게
이야기를 꾸미는 일이라고 했다. 발주되는 일량은 많지 않을 것이고, 그나마 경쟁이 붙으면 수익이 박해질 것이고.
내가 그런 눈으로 봐서 그런지 용호가 여위어 보였다.

나는 신영일이는 잘 모른다.
영일이가 누구나 칭찬하는 사나이의 길을 짧게 살다 갔다는 이야기를 오래 전부터 들어 왔다.
그새 영일이의 20주년 행사를 했다는 용호의 추도사에 덧대
이영목,윤경욱,임성래,김영주가 추도사 수준의 댓글을 실었다.

한줄한줄 읽어 가며 광주일고 51회 동기의 한사람으로서 뜨거운 동지애를 느낀다.
누군가가 말했었다.
"나를 남에게 주는 것이 <운동>이다.
<운동권>이란 나를 줘버린다는 사회적 흐름에 젊음을 맡겼던 사람들이다."라고.

나도 <운동>을 했었다는 강변에 가까운 억지회상을 한다.
아니 앞으로라도 <운동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앞으로의 내 하반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스스로 묻는다.
신영일이 20주년을 맞이하여, 남아있느 전영호를 생각하며.

50대에 어울리는, 나에게 알맞는 <운동>을 찾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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