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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들불야학 2009년 이광재기자 mail 등록일 2010-11-15
작성자 김연옥 조회수 1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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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등불에서 시대의 들불로 ~ 들불야학2009/05/03 18:39 5월의 작품들/윤상원 열사

노동자의 등불에서 시대의 들불로

‘들불야학’    이광재 기자  


 들불야학. 광주지역 최초의 노동야학으로 출발해 70년대 말 노동운동과 학생운동, 주민운동의 불을 지폈고, 오월항쟁의 한복판에서 활활 타올랐다.


들불야학이 실재했던 기간은 꼭 3년이었다. 78년 7월 1기 입학식을 치른 이래 80년 5월을 거친 뒤 81년 7월 4기 졸업식까지 치른 뒤 해체됐다. 그렇게 보면 들불은 어쩌면 ‘5월 광주’를 위해 예언처럼 준비됐고, 광주가 쓰러지자 그와 함께 스러져 갔던 것인지도 모른다.

실제, 항쟁기간 투사회보 제작팀은 주로 들불야학의 강학과 학생들이었다. 들불2기 강학이었던 전용호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투사회보 팀이 어느새 시내 YWCA로 옮겨와 있었다…강학뿐만 아니라 학생들까지 연락이 되었는지 많이 나와 일을 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들불야학 강학과 학생들로 단일하게 운영되었던 투사회보 팀은 마치 어디 합숙이나 온 듯이 즐겁게 일을 하였던 것 같다.>(《들불의 역사》, 들불열사기념사업회)


또한 오월항쟁 직후 들불야학 출신들이 처한 상황을 보면, 2기 강학이었던 윤상원과 특별강학 박용준이 항쟁 마지막날 도청과 YWCA에서 각각 사망했고, 특별강학 김영철 등 4명은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갔으며, 3기 강학 박관현, 특별강학 박효선 등 10명에게는 수배가 내려졌다.


‘오월 광주’를 위해 예언처럼 준비되다

하지만 들불야학의 의미는 5월로만 한정할 수 없다.  

들불열사기념사업회 윤한봉 이사장은 “들불야학은 70년대 말 광주지역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주민운동을 연결시켜주는 구실을 했다”며 광주지역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오월항쟁이 우발적이 아니라 준비된 항쟁이었다는 평가는 이 같은 시각을 근거로 한다. 또한 들불야학은 해체 이후에도 살아남은 자들을 통해 또 다른 야학으로, 문화운동으로, 청년운동으로 불을 지펴나간 게 사실이다. 


야학 교사들은 스스로를 ‘강학’이라 했다. 가르칠 강(講)자에 배울 학(學)자를 썼다. 가르치면서 동시에 노동청소년들에게 배우겠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들불’이라는 이름은 창립멤버였던 박기순 열사가 제안한 것으로 전해진다. 소설가 유현종이 동학농민혁명을 소재로 쓴 소설 《들불》을 읽고 ‘들불처럼 번져간 동학혁명의 뜻을 기리자’는 의미였다고 한다.


박기순 열사는 들불야학 창립을 주도했지만, 야학을 세운 그해 겨울 불의의 사고로 숨졌고 이후 윤상원 열사와 영혼결혼식을 올렸다. 오월을 대표하는 노래 ‘님을 위한 행진곡’은 이들의 영혼결혼을 기리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박기순 열사 이후 들불야학 출신들의 고난은 이어졌다. 윤상원, 박용준 열사가 항쟁의 마지막 날 계엄군의 총에 사망했고, 82년엔 박관현 열사가 40여 일간의 교도소 단식투쟁으로 운명을 달리했다. 항쟁 이후 청년운동에 뛰어들었던 신영일 열사는 과로로 88년에, 들불과 함께 광천동 주민운동 시대를 열던 김영철 열사는 고문후유증으로 98년에, 이른바 ‘오월극’이라는 장르를 개척한 박효선 열사는 암으로 98년에 각각 생을 마감했다. 20년 사이에 모두 7명이었고, 이들이 살았던 삶은 평균 32년이었다. 사람들은 이들을 아울러 ‘들불7열사’라 부른다.

 

▲ 지난 57년 광천동성당 부지 내에 세워져 80년 광주 오월항쟁과 역사를 같이 했던 들불야학당

(맨 왼쪽 건물)이 도시계획으로 헐릴 위기에 처해 있다.

ⓒ 전라도닷컴


‘들불’처럼 번져간 동학혁명 기리자는 뜻

야학당은 들불야학 1기 입학식이 치러졌던 곳으로, 광주시 서구 광천동 광천천주교 교리실 건물이다.

당시 1기 입학식엔 광천성당 신부님도 축사를 해주었고 지역주민들도 함께 했다. 이곳에서 강학들과 학생들이 노동과 삶을 고민하고 나눴다. 이후 오월항쟁 기간엔 광주시민의 눈과 귀가 되었던  ‘투사회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항쟁 당시 직접적 전적지가 아니라는 이유로 5·18사적지에서 제외됐다.


1기 강학이었던 임낙평씨(현 광주환경운동연합 상임집행위원장)는 그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실제 계엄군과 시민군이 치열한 싸움을 벌인 곳은 아니예요. 하지만 항쟁과 떼어놓을 수 없는 곳이죠. 들불야학 출신들이 항쟁 이후 당국의 조사를 받으면서 가능하면 들불에 관한 진술을 축소했어요. 들불이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죠. 때문에 아직도 정사(正史)에선 야학 사람들의 역할이나 장소의 의미가 축소된 부분이 있지요. 지금 야학당이 헐릴 위기에 있는데 그 때 당시 이 부분까진 생각 못했죠.”


그의 말대로 들불야학당은 헐릴 위기에 있다. 광주시 도시계획에 따라 2007년 이후 신설예정인 4차선 도로가 야학당을 관통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성당측에서도 야학당 건물의 노후에 따른 붕괴위험과 신축건물 완공으로 용도가 사라져 이르면 올 연말 안에 철거할 계획이다. 들불열사기념사업회는 도시계획으로 철거된다 할지라도 그 자리의 의미를 기억할 수 있게 작은 기념공원 조성이나 표지석 설치문제를 성당측과 논의중이다. 


도시계획으로 헐릴 위기 ‘들불야학당’

광주시 서구 상무지구 5·18자유공원. 오월항쟁 당시 시민들을 잡아 가두고 고문하던 상무대 영창이 있던 곳이다. 이 공원 한켠엔 반달모양의 조형물이 서 있다. 그 벽면엔 일곱 사람의 얼굴을 새긴 동판이 북두칠성 별자리를 따라 붙어 있다.


들불7열사를 기념하기 위해 2년 전 들불열사기념사업회가 세운 추모조형물이다.

조형물이라는 기념사업방식을 두고 사업초기에 논란이 없지 않았지만, 일곱 열사들의 모습을 국립5·18묘지와 함께 이곳에서도 만날 수 있게 됐다. 우연인지, 그 자리는 과거 상무대의 정문 입구 자리였다.


조형물 앞에는 둥근 돌판이 하나 놓여 있어 추모객의 발길을 붙잡는다. 조형물의 제작자인 화가 홍성담씨는 “별자리로 보면 북극성 자리인데, 열사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삶을 생각해보는 자리”라고 제작 의도를 설명한 바 있다. 


들불열사들의 삶과 정신을 계승하려는 마음은 2001년부터 기념사업회로 모아졌다. 최근 사단법인화를 추진하고 있는 기념사업회(이사장 윤한봉)는 지난 10월10일 국립5·18묘지에서 제1회 들불열사 합동추모제를 가졌다.


그동안 열사들에 대한 추모행사가 열사들의 기일에 맞춰 개별적으로 진행되던 것을 봄과 가을 두 차례에 모아 치르자는 의미였다. 열사들의 떠난 날은 달랐지만, 산 자들의 모임은 그렇게 한 날 한 시로 모아지고 있었다.


기념사업회는 또한 이들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사업으로 들불상을 제정하기로 했다. 열사들 생전의 삶에 비춰 모범적인 노동운동가와 소년소녀가장, 인권운동, 빈민, 문화운동가 등 모두 7개 분야에 걸쳐 매년 한 사람씩 수상자를 선정할 예정이다. 2006년부터 시행하기 위해 현재 기금을 마련하고 있다.


정신계승 위해 들불상 제정 등 움직임

그동안 들불야학에 대한 기록들도 이어졌다. 《광주의 넋, 박관현》(사계절, 1987), 《들불의 초상-윤상원 평전》(풀빛, 1991),  《신영일을 배우자》(산하기획, 1998), 《윤상원의 미완의 일기》(금호문화, 1999), 《오월 광대-박효선》(2003) 등이 개별 열사들을 중심으로 들불을 조명했다. 그리고 일곱 열사들의 삶을 함께 모은 《들불의 역사》(이바지, 2002)가 단행본으로 나왔고, 논문 《들불야학의 역사적 평가를 위한 시론》은 들불야학에 대한 학문적 접근을 시도했다.


들불야학, 그들은 함께 불렀던 이 노래처럼 앞서 새벽을 준비했고, 민주주의의 심지에 불을 댕겼으며, 5월의 광야에서 들불이 되었다. 그들의 삶과 정신은 또 다시 밝아오는 새벽과 함께 그들을 기억하는 이들을 통해 시대를 밝히는 들불로 타오를 것이다.


<너희는 새벽이다 밝아 오는가/ 너희는 새암이다 솟아 오른다/ 심지에 불댕기고 앞서 나가자/ 민족의 새 아침이 밝아오는가/ 땀과 눈물 삼켜가면서 뛰어가자/ 친구, 사랑하는 친구,(친구) 들불이 되자(‘들불야학당가’)

사진=박영철 기자

*들불 7열사의 삶과 죽음


박기순(1958~1978.12)

전남대 학내 사건으로 무기정학을 당한 뒤 78년 여대생 최초로 공장에 위장취업했다. 그리고 들불야학의 창립을 주도했다. 야학 일로 며칠 밤샘을 한 78년 12월26일 연탄가스 중독으로 숨을 거두었다. 82년 6월 윤상원 열사와의 영혼결혼을 기리는 창작노래극에서, 김종률이 작곡하고 황석영이 백기완 선생의 시 ‘묏비나리’를 노랫말로 고친 ‘님을 위한 행진곡’이 처음 불려졌다.


윤상원(1950~1980.5)

대학을 졸업한 뒤 다니던 서울 직장을 던지고 광주에 내려와 공장노동자로 일하면서 들불야학 강학으로 활동했다. 사람들은 그를 일러 ‘5월을 위해 태어난 인물’이라 한다. 그만큼 항쟁 전 과정에서 그의 역할이 컸다. 수습위원회의 ‘총기반납’ 주장에 대해 항쟁입장을 굽히지 않았고, 마지막 항쟁지도부의 대변인 역할을 한다. 그리고 도청에서 생을 마감한다.


박용준(1956~1980.5)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에게 버려졌고 성장과정도 가출과 고학의 연속이었다. 73년 광주 YWCA신협에 수금사원으로 취직하면서 김영철과 형제의 연을 맺었다. 그 인연은 다시 광천동 시민아파트로, 그리고 들불야학으로 이어졌다. 워낙 필체가 좋고 속도가 빨라 항쟁기간 투사회보 제작에서 전문 필경사 역할을 했다. 항쟁 마지막날 새벽, YWCA를 지키다 생을 마감했다.


박관현(1953~1982.10)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법대생에서 광주공단실태조사에 나섰다가 들불강학으로, 그리고 80년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 항쟁의 불을 지폈다. 5·17 계엄직후 수배생활 중에는 공장 노동자로 살았다. 2년 가까운 도피생활을 하다 붙잡힌 뒤 광주교도소에 수감됐다. 오월항쟁 진상규명과 교도소내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3차례에 걸쳐 40여 일간의 단식투쟁을 하다 운명을 달리했다.


신영일(1958~1988.5)

전남대에서 학생운동을 하던 중 무기정학을 당한 뒤 박기순 등과 들불야학 준비 팀에 합류한다. 들불야학 학당가를 직접 작사·작곡할 정도로 창립 초기부터 적극적이었고, 국사 담당 강학으로 활동했다. 오월항쟁 이후 학생운동 재건에 매달렸고, 광주지역 청년운동에 헌신했다. 고문과 부상, 단식투쟁의 후유증, 피로 누적으로 병마와 싸우다 세상을 떠났다.


김영철(1948~1998.8)

지역 명문이었던 서중·일고를 나왔으나 가난한 탓에 공무원이 됐다. 그러나 공직비리에 염증을 느껴 소외받은 삶과 함께 하기로 마음먹고, YWCA신협과 인연을 맺는다. 77년 광천동시민아파트에 입주해 ‘주민운동’을 하던 중 들불야학과 만났다. 항쟁지도부의 기획실장으로 도청에서 저항하다 체포됐다. 이후 고문후유증으로 그의 의식은 98년 죽는 순간까지 ‘광주 5월’에 머물러 있었다.   


박효선(1954~1998.9)

79년 여름, 야학 학생들과 연극작업을 하면서 문화담당 특별강학으로서 들불과 인연을 맺게 된다. 극회 ‘광대’를 꾸리다 80년 오월항쟁에 투신, 도청지도부 홍보부장으로서 항쟁을 이끌었다. 3개월 여의 옥고와 20개월간의 수배생활을 청산한 뒤 83년 극단 토박이를 창단, 4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금희의 오월> <모란꽃> 등 오월을 주제로 한 작품활동에 천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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