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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새날이 올 때까지 영원한 '5월의전사윤상원-고종석- mail 등록일 2010-11-15
작성자 김연옥 조회수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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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날이 올 때까지 영원한 ‘5월의 전사’ 윤상원(1950~1980)


        출처 : [발굴 한국현대사 인물67]  (1991.5.3. 한겨레신문 연재, 고종석 글)


도청서 최후의 항전 산화


그는 카빈소총을 든 채 창밖을 내다보았다. 희붐히 밝아오는 새벽하늘 밑으로 멀리 무등산의 능선이 어렴풋이 보였고, 눈 아래 주택가에는 플라타너스 이파리들이 희미하게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곳 도청 민원실 2층 회의실에만도 40여명의 시민군들이 최후의 항전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 모두와 마찬가지로 그도 자신의 운명을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아마도 다시는 밝은 햇살 아래 싱싱하게 푸르른 무등산을, 해방의 환희가 넘쳐 흘렀던 금남로를, 사랑하는 가족과 벗들을 못 볼 것이었다. 편안한 유택 하나가 그를 위해 마련될 지조차도 의문이었다. 항쟁 초기에 얼마나 많은 주검들이 군용트럭에 실려 알 수 없는 곳으로 사라져갔는가.


그의 왼켠 창틀을 지키고 있던 동지 이양현과 조금전에 나눈 대화는 그러므로 일종의 이별의 제의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10일간의 항쟁과 5일간의 ‘대동세상’을 되돌아보았고, 저승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했으며, 다시 태어나더라도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해, 핍박받는 민중의 해방을 위해 헌신하기로 다짐했다.


M-16 자동소총의 끔찍스러운 총성이 점점 가까워졌다. 하늘에선 헬리콥터 소리가 들리고 예광탄의 섬광이 무등산을 더욱 또렷이 드러냈다. 최루가스로 찬 회의실 이곳저곳에서 재채기 소리가 들렸다.


시민군 한사람이 복도를 통해 도경찰국으로 이어지는 회의실 뒷문을 급히 열고 들어오며 도청의 뒤쪽, 그러니까 금남로의 반대쪽이 무너졌음을 알렸다. 공포와 절망의 분위기가 다시 한번 회의실을 감쌌다.


그때 귀를 째는 듯한 M-16 총성이 새벽공기를 가르며 회의실에 박혔다. 그의 왼손으로부터 카빈소총이 스르르 떨어졌고, 오른손으로 감싼 아랫배와 등에서 새빨간 피가 새어나왔다. 그의 몸이 회의실의 차가운 타일바닥 위로 쓰러졌다.


1980년 5월 27일 오전 4시 30분께. 시민군 대변으로서 광주민중항쟁을 이끈 윤상원(尹祥源)의 30살 삶이 흐너지는 순간이었다.


그해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전남지역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시각은 여럿이다. 관변쪽에서는 그것을 87년 대통령선거 이후에 ‘민주화운동’으로 정리했고, 보수야당을 포함한 자유주의 부르좌 진영에서는 ‘시민항쟁’으로 보고 있으며, 우리 사회 진보세력의 주류는 ‘민중항쟁’이라고 부르고 있다. 진보세력 가운데 예를 들어 민족민주변혁론(NDR)처럼 좀더 급진적 입장을 취하는 그룹은 노동자계급의 주도성과 목적의식적 자발성을 특히 강조해 그것을 ‘무장봉기’로 해석하기도 한다.


입장과 태도에 따라 항쟁의 성격과 거기에 참여한 여러 계급·계층의 중요도에 대한 판단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이루고 있지만, 10일 동안의 항쟁과정에서 윤상원이라는 개인이 해낸 역할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높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 높은 평가는 그가 항쟁기간에 보여준 남다른 책임감과 헌신성으로부터 온다. 어떤 이는 그에게서 불요불굴의 혁명가를, 어떤 이는 성실하되 평범한 노동운동가를, 또 다른 이는 단지 양심적인 지식인을 발견하지만, 그들 모두 5월 광주의 한복판에 그를 세워놓고 있다. 그렇다는 것은 그때 그곳에서 쓰러져간 ‘전사들’ 모두를 윤상원이 대표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을지라도, 최소한 윤상원이 탁월하고 헌신적인 5월의 전사였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이다.


또 실제로 윤상원은 전남 사회문제연구소가 추진하고 있는 그의 평전 발간과 ‘윤상원상’ 제정으로 5월항쟁의 한 상징적 이름이 되어가고 있다.


윤상원은 6·25가 난 50년 8월 전남 광산군 임곡에서 자영농 윤석동씨와 김인숙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집은 지금도 남아 있다, 광주가 직할시로 승격하면서 광산군이 광주시에 편입돼 그 집의 지금 주소는 광주시 광산구 신용동 507로 돼 있다. 이 집에는 지금 노부모와 막내 여동생 승희(23)씨가 살고 있다.


윤상원의 성장기, 그리고 군복무 직후까지의 삶에서는 크게 특기할 만한 부분이 많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는 평범한 소년으로서 임곡국민학교를 마치고 광주로 나와 자취와 하숙을 하며 북중(현재의 북성중)과 사레지오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두 번의 대학입시 실패 끝에 71년 봄 전남대 문리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군복무 뒤 학생운동 가담


다만 그가 일찍부터 일기쓰기에 버릇을 들여 국민학교 4학년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해마다 한권 이상씩의 일기를 남겨놓은 것이 주목된다. 일기들 속에는 대개 그 또래의학생들이 겪음직한 실존적 고민들과 일상적 갈등들이 담겨있다. 병으로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병원비, 두 숙부의 교육비, 아버지가 잘못 선 빚보증 때문에 가세가 날로 기울어 7남매 중 홀로 광주에서 유학하고 있는 장남으로서의 책임감이 그를 압박했지만, 애옥살림과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만이 사춘기의 그의 삶을 다소 일탈적으로 만들기도 했다.


한 예로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대 친구들과 ‘에덴클럽’이라는 다소 질나쁜 서클을 만들어 공부보다 노는 일에 열중하며 술·담배를 가까이 하다가 부친으로부터 의절선언에 가까운 나무람을 듣기도 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시위에 열심히 참가하기는 했지만 당시 ‘유신’ 직전 정치정세의 가파름에 견주어 그의 정치의식이 특별히 높았다고는 볼 수 없었다는 것이 친구들의 회고다. 다만 그는 연극반에 들어가 연기에 특별한 재능을 보였고, 거기서 벗들을 사귀며 비교적 자유분방한 신입생 시절을 보냈다.

그는 1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해 일반하사로 경북 상주에서 33개월간 복무한 뒤 75년에 복학했다. 그가 군에 있을 때 터진 10·17정변, 전남대 ‘함성지사건’, 민청학련사건 등으로, 돌아온 교정의 분위기는 살벌했지만, 그는 복학 뒤에도 얼마 동안은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고, 그동안 더 어려워진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외무고등고시 준비에 열중했다.


그러다가 그의 삶에 결정적 전환을 가져온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친구의 소개로 이뤄진 전남대 선배 김상윤과의 만남인데, 민청학력사건으로 15년형을 선고 받고 75년 2월의 ‘특사’로 풀려난 김상윤과의 이 만남을 통해 윤상원은 실존적 고민의 테두리를 벗어나 처음으로 역사와 맞부딪치게 된다. 윤상원은 김상윤이 주축이 된 독서서클에 가입해 집중적인 학습을 통해 우리 사회의 기본적인 모순과 해결방법을 모색하게 되었고 그의 교우관계 또한 학내의 ‘선진’ 학생들로 넓혀졌다.

그러나 졸업반 때 그가 혼신을 다해 계획한 4·19 17주년 시위는 불발로 끝나고 그는 현실에 떠밀려 78년 1월 주택은행에 입사했다. 그 전해 9월 김상윤은 사회과학 서적의 유통처이자 광주운동권 인사들의 모임터가 될 녹두서점을 계림동에 열었는데, 윤상원 또한 이 서점을 통해 운동권 인사들과의 교분을 더욱 다졌다.

은행원으로서의 그의 서울 생활은 그러나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가족의 생계를 꾸리며 중산층으로서의 안락한 생활을 이어나갈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이 땅의 억압받은 민중 한가운데로 자신을 집어던져 역사의 편에 설 것인가를 고민하던 그는 서울살이를 시작한 지 반년 만인 그해 7월 10일 일터인 주택은행 봉천동지점에 사표를 내고 광주로 돌아왔다.


그 뒤로부터 도청에서의 산화까지 그의 길지 않은 역정을 지금 돌이켜보면 역사가, 또는 운명이 80년 5월을 위해 그를 귀향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들불 야학 통해 노동운동

 

그는 학력을 속이고 관천공단 안의 한남플라스틱에 일용노동자로 취업한다. 이른바 ‘위장취업자’가 된 것이다. 몇 개월 지속되지 못한 노동자 생활은 그에게 별다른 조직적 성과보다는 노동자적 삶의 실감을 선사했다.

그는 노동자생활을 하며 전남대 휴학생 박기순(여)이 중심이 돼 만든 들불야학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이 노동야학을 이끈다. 들불야학과의 만남, 또는 박기순과의 만남은 김상윤과의 만남에 이어 그의 삶을 전환시킨 두 번째 사건이다. 그는 이 들불야학을 통해 한사람의 완숙한 운동가로 성장했고, 당국의 탄압을 이겨가며 그가 이끈 이 야학출신의 노동자들은 뒷날 5월 항쟁 당시의 유일한 민중언론이었던 <투사회보>의 제작팀이 된다. 그는 아예 광천동 시민아파트의 방한칸에 사글세로 들어가 살며, 이 지역에서 주민운동을 하던 김영철과의 연대 속에 노동운동의 기초를 닦는 한편, 학생운동을 지원한다.

 

그러던 중 78년 성탄절 새벽 윤상원과 함께 들불야학을 이끌었던 박기순이 연탄가스로 사망한다. 윤상원과 함께 광주·전남지역 최초의 ‘위장취업자’였던 박기순, 6·29교육지표시위사건으로 강제휴학을 당한 뒤 노동야학운동에 헌신해 ‘노동자의 누이’로 불리던 박기순의 어이없는 죽음은 윤상원에게 큰 상처를 입히지만, 그 죽음은 그들을 갈라놓기는커녕 뒷날 오히려 역설적으로 그들을 결합시킨다.


박정희가 죽었다. 역사의 새로운 페이지가 열릴 것 같던 이듬해 1월 서울에서 내려온 노동운동가 이태복은 윤상원에게 전국민주노동자연맹이라 불리게 될 전국적 규모의 노동운동조직에 가담하기를 권유했고, 이를 수락한 윤상원은 얼마 뒤 전민노련의 중앙위원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5·18이 터졌다. 5월항쟁의 전과정을 통해 윤상원은 선전·선동의 탁월한 기획자·실행자로 활동했다. 그가 초안을 잡고 들불야학 강학(교사)들이 19일 오후에 시가지에 배포한 최초의 호소전단 ‘광주시민 민주투쟁회보’를 비롯해, 각종 선언문과 9호까지 나온 <투사회보>의 편집·제작·배포를 밤잠을 잊은 채 지휘한 것도 그이고, 수습위의 투항적 자세를 견제하기 위해 ‘해방광주’의 도청앞 광장에서 매일 ‘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를 주동적으로 조직해낸 것도 그이며, 내외신 기자들 앞에서 항쟁의 대의를 설명하는 임무를 맡은 것도 그이다.


수습위 투항적 경향 견제


더구나 그와 최후를 같이 하거나 끝까지 도청에 남은 지식인 동료들 대부분이 공수부대에 의해 장악된 항쟁 초기의 광주를 일시적으로 떠났던 것에 견주어 그는 시종일관 이 ‘빛의 땅’을 지키며 도청접수에 참가했고, 파시즘의 물리력에 맞서 싸우며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5월광주를 역사의 비석에 깊게 새겼다.


그와 가까웠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가 모난 데 없이 원만한 성격으로 누구에게나 친근감을 주면서도 원칙의 문제를 양보하지 않는 단호함을 보였다고 입을 모은다. 여기에는 그가 대학의 연극반 시절부터 키워오던 ‘광대기질’이 한목한 것으로 보인는데, 김상윤씨는 그 ‘광대기질’의 한 예로 탁월한 소리솜씨를 들었다. 특히 현대 판소리 <소리내력>을 부르는 그의 솜씨는 문화계 인사들에게 널리 알려진 바 있다.


그의 죽음을 지켜본 바 있는 이양현씨는 그를 “광주항쟁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회고했다. 들불야학 때부터 그의 동지이자 후배인 임낙평씨도 이 말에 동의하며 윤상원은 항쟁에 참여한 각계각층의 세력들을 하나로 조직해 항쟁에 질서를 부여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또 이태복씨에게 윤상원은 농민운동의 힘이 압도적인 광주·전남지역에 노동운동의 씨앗을 뿌린 사람이자, 자신의 기득권에 눈 돌리지 않았던 올곧은 자세의 운동가이다.


그러나 자식의 역사적 영광은 그 육친에게 때로는 지울 수 없는 상처이다. 자식의 죽음에 대한 감정을 “말로는 표현 못하겠다”고 말한 어머니 김인숙씨는 “아드님이 자랑스럽지 않느냐”는 질문에 눈물을 글썽이며 “모르겠다. 어쩐지..”라며 말끝을 흐렸다.


동지 박기순과 영혼결혼


82년 2월 20일 정오 망월동 묘역에서는 윤상원과 그의 노동동지 박기순 사이의 영혼결혼식이 친지들의 참석 하에 열렸고, 그 영혼결혼식을 모델로 해서 노래굿 <넋풀이>(일명 <빛의 결혼식>)가 만들어졌다. 이 소품의 마지막 곡이 김종률씨가 작곡하고 소설가 황석영씨가 작사한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는 구절로 끝나는, 이 80년대의 가장 널리 알려진 운동가요를 통해 윤상원과 박기순은 공장과 교정과 거리에서, 진보의 외침이 들리는 이 땅의 구석구석에서 새롭게 살아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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