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제목 왜 메이데이에 윤상원인가-하승립기자 mail 등록일 2010-11-15
작성자 김연옥 조회수 1880
참조링크
 

왜 메이데이에 윤상원인가 

[메이데이 특집] Ⅱ 다시 '윤상원'이다

준비되고 단련된 ‘5월 정신’의 선구자

다른 사람의 희생으로 얻어진 기득권은 포기하라 

 

 [11호] 2005년 05월 10일 (화)  하승립 기자lipha@laborplus.co.kr 

 

 

올해 5월 1일은 제 115주년 메이데이다. 그리고 5월 18일은 광주민중항쟁 25주년이 된다. 이 두 역사적 사건은 5월이라는 시기적 유사성을 제외하면 별 연관이 없을 듯 보이지만, 둘을 잇는 한 인물로 인해 중요한 연결고리를 갖게 된다.


그가 바로 ‘광주의 새벽별’ 윤상원이다. 윤상원은 광주항쟁 지도부의 대변인이었고, 그와 동시에 노동운동가였다. 당시 시민군의 상당수가 광주 지역 노동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윤상원은 탁월한 리더였다. 전술적 선택과 상황 판단, 조직 구성원에 대한 관리와 애정, 그리고 비전을 통해 광주민중항쟁을 한국 민주주의의 씨앗으로 만들어냈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운동 위기의 시대에 윤상원을 다시 되짚어보는 것은 의미 깊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야학을 이끌다


전남대를 졸업한 윤상원은 제대 후 주택은행 서울 봉천동 지점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운동을 생각했던 윤상원은 ‘안정된 직장’에서의 생활을 7개월 만에 정리하고 광주로 내려와 한남플라스틱이라는 작은 공장에 취업한다. 이른바 ‘위장취업’인 셈이었다.


그리고 윤상원은 자신의 삶에 있어 마지막까지 동반자가 되었던 ‘들불야학’과 만나게 된다. 들불야학은 광주 지역 최초의 노동야학이었다. 들불야학은 1978년 7월 1기 입학식을 갖고 광주 광천동 지역에서 문을 열었다. 이때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들이 김영철(광주항쟁 당시 상황실장), 박기순, 임낙평 등이었다.


이들이 거점으로 삼은 광천동 지역은 당시 소규모 공장을 중심으로 한 공단이 형성되어 있었다. 광천시민아파트 171세대에 대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가구당 평균 소득이 월 5만4000원, 부채가 18만원으로 전형적인 저소득 노동자 밀집지역이었다.


윤상원은 후일 영혼결혼식을 올린 박기순의 권유에 따라 1978년 10월부터 들불야학에 합류한다. 이들의 내부 회의록 등을 살펴보면 들불야학의 성격과 역할에 대해 ▲ 청년 학생들과 근로대중과의 연대 ▲ 근로대중의 의식화·조직화 등을 꼽고 있다. 뚜렷한 목표를 가진 노동운동이었던 셈이다.  윤상원은 특히 1978년 12월 말부터 1979년 2월 말까지 광주공단 노동자 실태조사를 실시하기도 했다. 어떤 조사나 실태파악도 없이 방치되어 있던 노동자들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자료화하는 작업을 진행한 것이다.


전국적인 전망을 갖다


윤상원이 노동운동의 선구적 전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전국민주노동자연맹(전민노련) 활동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당시 학생운동 진영에서 노동운동을 위해 현장으로 가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누구도 전국적인 노동운동 조직을 결성할 생각을 하지 못하던 시점이었다. 실제로 전국 조직 논의가 시작된 것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이다.


그러나 전민노련은 그때부터 전국적인 노동운동 조직을 생각하고 있었다. 윤상원은 오랜 기간 토론을 거쳐 전국 조직을 결성키로 하고 1980년 4월 전민노련 중앙위원이 된다.


광주항쟁의 마지막 날이었던 1980년 5월 27일, 끝까지 전남도청을 지킨 것도 윤상원의 몫이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결과가 뻔하고, 나중에 닥쳐올 상황 때문에 발을 뺄 때도 누군가는 남아야 한다는 원칙과 소신을 지켰고 그 날이 그의 생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광주항쟁은 그 출발점이 학생들에 의한 것이었지만,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끝까지 남았던 이들은 노동자였다. 고은 시인은 항쟁의 핵심에 대해 “각종 일용노동자, 공원, 농투산이, 도시빈민, 구멍가게 주인, 구두닦이, 목욕탕 때밀이, 운전수, 버스 안내원” 등이었다고 기록했다.


노동운동이 외면하는 노동운동 지도자


이런 윤상원의 생가가 지난해 말 누전으로 추정되는 화재로 불타버렸다. 윤상원의 생가에는 평소 그가 썼던 일기장, 각종 서적 등의 자료가 보관되어 있었지만 화재로 상당 부분 불타고 말았다. 윤상원의 아버지 윤석동 옹은 생가 복원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고, 그 결과 국가보훈처와 대한주택건설협회 등이 나서 복원키로 하고 현재 공사가 진행 중이다.


하지만 정작 노동계는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이지 않았다. 윤상원의 후배로 들불야학에서 함께 일했고, 윤상원의 죽음 이후 ‘마음의 빚’ 때문에 윤상원민주사회연구소를 설립한 정재호 소장은 “섭섭한 마음보다는 입장이나 이해관계의 차이에만 집중하는 운동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고 밝혔다.


‘광주항쟁지도자 윤상원열사 생가복원 추진위원회’ 상임대표를 맡은 정 소장이 민주노총 등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대부분 취지에는 공감하면서도 실제로 모금을 진행한 곳은 없었다. 공사가 진행 중인 현재도 1500만원 정도가 부족한 실정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지역 노동계의 한 인사는 “국가보훈처 같은 관변단체가 추진하는 사업에 들러리 서기 싫다”고 발을 뺐다.


정 소장은 “광주항쟁을 산업화 속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으로 바라보고, 오늘날 벌어지는 차별과 소외의 문제를 역사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하려는 시각이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고 토로했다.

최근의 노동운동이 사회적 비판에 직면해 있는 것은 ‘연대와 나눔’이라는 기본 정신을 잃은 채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 대해 윤상원은 이미 25년 전에 명확한 답을 제시했다. 계산이나 자신이 이익을 버리고 공동의 목표를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것이다.


정 소장은 최근 노동운동의 위기에 대한 해법을 ‘5월 정신’에서 찾자고 제안했다.

“다른 사람의 희생을 조건으로 얻어진 기득권을 포기하는 겁니다. 5월 광주에서 시민들은 서로 죽기를 자처했지, 서로 살겠다고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지는 않았습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