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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상원 ]
제목 윤상원과 들불야학 mail 등록일 2010-07-15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1312
 

윤상원과 들불야학

 1978년 10월 25일 수요일

아고메! 피곤허다. 정말로 피곤해 미치것다. 난생 처음으로 공장노동을 시작해 보는 날이었다. 도시락을 자전거 뒤에 꽁꽁 매달고 늦을 세라 페달을 밟아 회사에 도착해 보니 7시 50분. 꽤 정확한 셈이다.

공장장 인도를 받아 절단부로 배치되었다.

배성순 아저씨. 얼굴에 눈꼽만치도 악한 티가 없이 그저 성실한 노동자였다. 하얀 판이 나오면 적당한 두께로 절단하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그렇게 고되거나 어려운 일은 아닌 것 같았다. 트럭이 오면 짐을 실어주는 일이 훨씬 힘들었다. 점심은 100원짜리라고 한다. 신 김치에 시래기 국, 혼합곡 밥, 그래도 맛이 좋아 한 그릇을 다 먹어 치웠다.

 제일 궁금한 것은 나의 노임이 얼마나 될까 하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한 시간당 120원이라고 한다. 아침 8시부터 오후 7시까지니까 점심시간 한 시간을 제하면 10시간 노동인 셈이다. 10시간에 1천 2백원, 이걸 벌려고 하루 종일 이 지랄이라니. 오늘 하루 250만원어치가 팔렸다고 하니 그 중에 임금은 50명 잡고 고작 6만원밖에 안 되는 셈이다.

 오후쯤에 몹시 피곤하고 짜증이 났다. 자주 시계를 보아도 시간이 안 가는 것 같았다. 오후 5시쯤엔 국수 먹는 시간이란다. TOT거리로 국수를 주는 모양이다. 멸치국에 말아 먹는 국수가 이렇게 맛있을 줄 이야. 다 노동한 덕 아니냐.

 국수를 다먹고 나니 나른하고 조금은 졸립고 하는 일이 더 없어 짜증스러웠다. ‘1시간 120원’ 이걸 생각할 때마다 기계를 부셔버리고 싶었다. 이건 아마 감정이리라. 더 고된 일을 다른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해내고 있지 않은가!


 위 글은 1978년 광주시 광천동 공단 안의 스트로폴을 제조하는 공장에 학력을 속이고 취직한 윤상원이 출근한 첫 날 쓴 일기 중의 한 대목이다. 그는 일기에서 ‘1시간 120원’이라는 저임금에 기계를 부셔버리고 싶다고 분노를 표시하고 있다.

 윤상원은 1950년, 전남 광산의 농촌에서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빈한한 농촌 살림이었지만 장남인 윤상원을 광주에 유학을 시켜 그는 중 ·고등학교를 무사히 마치고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는 처음에는 고시에 합격하여 집안을 일으키고 출세해야 겠다는 목표를 설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 유신독재권력에 저항하여 결성된 민청학련 사건에 관련된 김상윤 등 선후배 들과 만나 역사와 철학에 관한 독서와 사색의 과정을 거치면서 인생관이 바뀌었다.

노동자로서 살면서 사회와 정치를 변화시키는 데 자신의 일생을 바치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된 것이다. 대학 졸업을 앞둔 그는 커다란 고민에 휩싸이게 되는데 그것은 자신이 살아가려는 방향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부모님과 동생들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 것인가 라는 것이었다.

그는 오랜 고민 끝에 일단 취업을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것은 그 동안 길러주신 부모님에 대한 최소의 예의이자 경의라고 판단하였다.

 1978년 2월, 그는 시험을 치러 입학한 서울의 주택은행 봉천동 지점에 출근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6개월 후인 1978년 8월, 그는 부친에게 장문의 편지를 띄운 후 회사에 사표를 제출하고 광주에 내려 왔다.

이윽고 2개월 후인 1978년 10월, 그는 학력을 속인 이력서를 제출하여 ‘1시간 120원’의 일당 노동자로 공장에 취업을 하였다.

말하자면 광주 지역 최초의 위장취업자였던 셈이다. 위의 글은 그가 공장에 노동자로 취직하여 출근한 첫 날에 쓴 일기 중의 한 대목이다.

 1978년 8월, 어느 날 들불야학의 강학 박기순은 녹두서점에 들렀다가 윤상원 선배가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 서울의 직장을 정리하고 광주에 내려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즉시 윤상원 선배를 만나 들불야학의 강학을 맡아 달라는 제안을 하였다. 그녀는 즉시 윤상원 선배를 만나 들불야학의 강학을 맡아 달라는 제안을 하였다. 처음에 윤상원은 자신은 야학이 아닌 노동 현장인 공장에서 활동하고 싶다는 이유로 거절을 하였다. 하지만 박기순의 권유는 계속되었다. 10월 중순, 그는 마침내 선배인 김상윤, 동료인 이양현 등과 논의 끝에 드디어 야학에 참여하였다. 그 해 11월, 윤상원은 아예 거처를 광천동 시민아파트로 옮겼다. 그의 3평 남짓한 크기의 단칸방은 들불야학의 사랑방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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