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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기순 ]
제목 불의의 사고, 박기순 강학의 죽음-들불의역사중 33P- mail 등록일 2010-07-15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3257
 

불의의 사고, 박기순 강학의 죽음

 “우리 시대의 학교는 필요악이다. 자본가의 논리를 가르치고 자본가의 의식을 가르쳐 허위허식만을 가르쳐 그들의 노예를 키우려는 우리 시대의 학교는 암적 존재다.”

 위 글 은 들불야학 강학이었던 박기순의 공책에 기록된 일기 중의 한 대목으로 5월 역에 윤상원 열사와 합장되기 전까지 처음 매장 되었던 망월동 일반묘역의 비문으로 새겨져 있던 글이다.

 1957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난 박기순은 입시를 치러 합격한 명문고인 전남여고를 졸업한 후 전남대학교 사학과에 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신문사 기자인 큰오빠 박화강, 미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었던 둘째 오빠인 박형선, 그리고 둘째 오빠의 선후배들인 광주의 운동권인사 윤한봉, 김남주 시인, 김상윤, 이강, 김정길 등의 사상적 영향을 받으면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녀는 1976년 전남대학에 입학한 후 독서서클인 ‘루사’에서 활동을 하였다. 1978년 6월, 전남대에서 시위로 번졌던‘민주교육지표선언 지지시위’ 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정학을 당하였다.

 1978년 5월은 들불야학 창설에 대해 처음으로 의견이 제시되었던 때이다. 야학 창설을 처음으로 제기한 사람들은 서울에서 야학 경험을 가지고 있던 최기혁, 전복길, 김영철 등 광주 출신 서울의 대학생들이었다. 그들은 모두가 서울 구로공단 주변 달동네였던 신림동 ‘겨레터야학’ 강학 출신들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시위와 관련하여 직권 휴학을 당하여 고향인 광주에 내려와 군대 징집영장을 아놓고 있던 참이었다.

 그들이 광주에도 야학이 필요하다는 제안을 음 만나서 한 사람은 박기순이었다. 평소 민중현장에 대한 구체적인 접근이 없는 운동은 관념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박기순은 그 제안을 극적으로 수용했다. 그리고 그녀는 야학운동을 함께 할 다른 사람들을 찾는 일을 책임졌다. 그녀는 학내 독서 서클에 참여하고 있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 야학운동에 관해 설명을 하면서 참여를 권유하였다. 그녀의 열성으로 신영일, 나상진, 임낙평, 이경옥 등 동의하는 학생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그로부터 2개월 후 들불야학은 설립되어 입학식을 하였다.

 한참 야학 설립 준비를 하던 6월 하순, 전남대에서 송기숙 교수 등의 ‘민주교육지표 선언 사건’이 일어났다. 교수들은 사찰당국에 의해 즉시 체포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전남대 학생들은 즉시 모여 연행된 교수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렸다. 박기순도 시위 현장에 있었다. 경찰이 출동하여 시위는 진압되었고 많은 학생들이 연행되었다. 그녀도 현장에서 연행되어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그 사건 후 그녀는 대학생 신분을 숨기고 광천동 공단에 있는 동신강건사라는 회사에 취직을 하였다. 2개월 후 대학교에서 무기정학 처분이 풀렸다. 하지만 그녀는 이번에도 스스로 학교를 휴학하고 계속 공장에 다녔다.

 1978년 12월 26일, 박기순은 야학 학생들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뜬눈으로 지샜다. 다음날 기순과 학생들은 교실의 겨울 난방용 땔감을 구하기 위하여 근처 야한을 헤매고 다녔다. 그리고 밤 11시에야 학생들과 헤어졌다. 기순은 오랜만에 오빠 집으로 향했다. 그녀는 오빠 집에서 밥 한 그릇을 먹고 난 후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이틀만에 자는 잠이었다. 그녀에게 이승의 마지막 날이었다. 아침에 그녀는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었다. 연탄가스 중독이었다. 학생운동에 몸담았으며 그 자신 투철한 여성노동자였으며, 여성활동가로 빼어나게 선구자였던 박기순은 그날 그렇게 갑자기 비명에 가고 만 것이다.

 박기순의 영혼을 기리기 위하여 영결식에는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며 들불야학과 전남대학교에서 노제를 한 후 망월동에 묻혔다. 소설가 황석영이 조사를 하고, 문병란 시인이 조시를 읊었으며, 멀리서 달려온 소리꾼 김민기가 상록수를 조가로 바친 기순의 장례식장은 온통 눈물바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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