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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노동운동은 운상원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하승립기자 mail 등록일 2010-11-15
작성자 김연옥 조회수 1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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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은 윤상원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메이데이 특집] Ⅱ 다시 '윤상원'이다

따뜻한 마음·원칙·판단력·결단력이 리더십의 원천

신중하게 판단하되 결정되면 반드시 실천한다 

 

 [11호] 2005년 05월 10일 (화)  하승립 기자lipha@laborplus.co.kr 

 

많은 사람들이 윤상원 하면 ‘투사’이자 ‘혁명가’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도 그럴 것이 광주민중항쟁의 가장 마지막 순간, 항쟁의 끝과 함께 총탄에 스러져 간 ‘최후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수많은 ‘명망가’들이 후일을 도모하자며 투항을 결정하던 순간에 그는 죽음을 선택했다. 마지막까지 저항하겠다는 결정은 다른 어떤 길도 없는 죽음의 길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윤상원은 언제나 항쟁과 무장투쟁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그것은 윤상원의 극히 일부분만을 보는 것이다. 그가 마지막 순간에 저항을 선택한 것은, 그리하여 죽음을 결정한 것은 역설적으로 ‘살기 위해서’였다. 만약 그 때 모두가 투항을 선택했더라면 광주항쟁은 지역의 소요 정도로 잊혀질 수도 있었을 것이고,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은 완벽한 승리를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최후의 저항이 수많은 시민군들의 죽음으로 마무리되면서 오히려 항쟁의 의미는 되살아났다. 그들의 희생으로 광주는 잊혀지지 않게 된 것이다. 윤상원의 선택은 강경투쟁만이 대안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의 희생을 통해 모두를 살리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마음은 따뜻하게


윤상원에게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었다. 그 힘은 순수함과 열정, 그리고 진솔함과 진지함에서 나왔다. 윤상원은 1980년 5월 26일 항쟁지도부 대변인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외신기자회견을 가졌다. 그 때 기자회견장에 있었던 <볼티모어 선>지의 도쿄지국장 브래들리 마틴은 지금도 윤상원을 참배하기 위해 한국을 찾곤 한다. 마틴은 당시의 윤상원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의 눈에서 예수를 느꼈습니다. 나의 죽음을, 이 자리의 진실을 알려줄 대변자로 당신을 선택했노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눈빛을 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제자에게 주는 그 눈빛을.”


윤상원은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1977년 8월 3일의 일기에는 그가 사람에 대해 가진 애정이 잘 드러나 있다.

“정원이(동생)와 상집이(김상집, 후에 전민노련 활동)가 8월 5일이면 군대에 간다. 나의 경우를 돌이켜보면 그들의 마음이 아무래도 평상시와 같지 않을 거란 짐작이 간다. 더욱이 마음이 약한 정원이 경우는 더할 것이다. … 부러 무관심해 왔는데 내일 모레면 곁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나의 마음이 허전한 것 같다.”


친화력과 인간적 면모에 대한 증언들은 상당히 많이 존재한다. 광천동에서 들불야학을 운영할 때는 지역 주민, 노동자들과 스스럼없이 가깝게 지냈다. 또 후배 박관현(80년 전남대 총학생회장)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 윤상원은 법대생으로서 향후 진로를 고민하던 박관현에 대해 “그 사람이 꼭 필요하다면 삼고초려가 아니라 십고초려를 해서라도 데려온다”고 말하고 합류시켰다.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를 하면 항상 옆에 다소곳이 수건을 받쳐들고 서 있었습니다. 어찌보면 참 봉건적인 스타일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바로 윤상원이 지닌 사람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었습니다.” (이태복의 증언)


가슴은 냉철하게


이렇게 따뜻한 사람이었지만 원칙은 반드시 지키고자 했다.


“평소에는 잔말을 하지 않고 지켜보다가 얘기할 때는 따뜻했습니다. 하지만 원칙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제가 상원형의 책을 빌린 적이 있었는데, 2주일이 넘도록 안 돌려줬더니 ‘다른 사람도 봐야하는데 늦었다’며 사정없이 야단을 쳤습니다. 그 때는 솔직히 서운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형이 사람을 대하는 원칙이었습니다.” (정재호의 증언)


판단력과 결단력도 뛰어났다. 무엇을 해야 할 때인가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통해 머뭇거림 없이 결단하고 이를 실천한 것이다.


“내가 본 윤상원은 첫째, 의사결정에 있어서 지식인으로서의 확고한 철학이 바탕이 된 자기결단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사실 당시로서는 누구나 부러워할만한 은행에 취직을 했다가 노동운동을 위해 다시 현장에 투신한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후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이른바 ‘현장투신’이 확산됩니다.” (임낙평의 증언)


“‘투사회보’를 만들 때 논란이 있었어요.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이 와중에 유인물 뿌리는 게 무슨 소용이냐’는 거였죠. 그 때 상원형은 그 논란을 다 듣고 나서 ‘그래서 이걸 만들어야 한다’고 정리했어요. 그리고 ‘투사회보’는 항쟁기간 내내 시민들에게 제대로 된 소식을 들려주는 유일한 매체가 되었죠.” (정재호의 증언)


“문제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혼자의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의 의견을 수렴한 후에 가장 적절한 선택이라고 생각되는 것에 대해서는 머뭇거림 없이 결정을 내렸다” (김상집의 증언)


 

노동운동의 리더십 복원이 필요하다


이러한 윤상원의 여러 면모는 그가 조직활동가로서, 그리고 리더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구호를 앞세우거나 정치적 계산에 따라 행동했더라면 광주항쟁 기간 중에 절대적인 신뢰를 받으면서 이끌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따뜻한 배려와 친화력, 인간적 면모는 물론 원칙을 지키려는 노력, 주변의 의견을 수렴한 정확한 판단, 결단력과 실천력을 갖출 때 진정한 리더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노동운동의 위기 속에서 리더십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많다. 노동계 내부의 이견들을 하나로 통합해내지 못하고 사회적 신뢰를 얻지 못한다면 노동운동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어쩌면 위기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진부한 격언이 필요한 시점이다. 암흑과 절망뿐이던 광주의 상처를 민주주의의 불씨로 되살려놓은 것은 윤상원의 리더십이었다. 그리고 그 리더십은 오랜 자기 헌신과 노력 끝에 나온 자연스럽고도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115주년 메이데이에 윤상원을 다시 떠올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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